[김태우] 1951년 4월 중공군의 5차 공세와 설마리∙가평 전투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3.04.12
[김태우] 1951년 4월 중공군의 5차 공세와 설마리∙가평 전투 가평전투 당시 캐나다군의 상징적인 사진 '장병들'. 당시 20세였던 기관총 사수 윌리엄 크라이슬러(William Chrysler·사진 오른쪽)가 부상한 동료 모리스 피셰(Morris Piche)를 전장에서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사진 저작권 ⓒImperial War Museum London/MH 33026 [전쟁기념관 제공]
/연합뉴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는데 6∙25 전쟁이 한창이던 72년 전 1951 4월은 한국인들에게 진실로 잔인했던 달이었습니다. 유엔군은 2월에 개시된 중공군의 4차 공세를 저지하고 썬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 라운드업 작전(Round-up), 킬러 작전(Killer), 리퍼 작전(Ripper) 등을 통해 서울을 재수복하고 3월 말에 38선을 다시 돌파했습니다. 4월에 들어서는 4 5~10 동안 러기드 작전(Rugged)을 통해 임진장-연천-화천-간성을 잇는 켄자스선까지 진격했고, 4 11~21일에는 돈틀리스 작전(Dauntless)을 통해 철원-김화-평강을 잇는철의 사막지대를 추가한 와이오밍선을 확보합니다. 하지만 유엔군의 북진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중공군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4 22 4개 병단 51개 사단에 북한군을 합친 30만 대병력으로 제5차 공세를 취하며 다시 남진을 시도합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전투로는 한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의 5차 공세의 첫 희생물로 전락한 사창리 전투, 영국군이 분전한 설마리 전투, 오스트랄리아(호주)군과 캐나다군이 사투를 벌인 가평 전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4 22~24,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 전투에서 장도영 장군이 지휘한 한국군 제6사단을 격파함으로써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듯 했습니다. 이 전투로 한국군은 2월 중공군의 제4차 공세 때 횡성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한 한국군 제8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치욕을 겪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설마리와 중부전선의 가평에서도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나옵니다. 4 22일에 중공군 제65군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서부전선의 임진강 남안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고지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유엔군을 공격했는데 당시 고지에는 글로스터 대대를 포함한 영국군 3개 대대와 벨기에 보병대대 한 개로 구성된 영연방군 제29보병여단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수적 우세를 앞세우고 글로스터 대대를 향해 포위공격을 감행했지만, 글로스터 대대가 병력의 1/3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악전고투 끝에 3일간 위치를 사수하는데 힘입어 영연방 제29여단은 결국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 영연방 제29여단은 1천여 명의 전상자를 기록하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중공군에게는 사상자 1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력 손실을 입혔습니다. 한마디로, 설마리 전투는 영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유엔군에게 서울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준 전설적인 방어전투였습니다.

 

호주군 여단과 캐나다군 경보병연대로 구성된 영연방 제27보병여단이 지키고 있던, 중부전선의 가평은 서울로 향하는 또 하나의 길목이었습니다. 사창리에서 한국군 제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중부전선의 유엔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유엔군의 동서 연결을 차단하고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고립시켜 서울을 압박하고자 했습니다. 이 목표 하에 중공군은 4 23~24일에 걸쳐 504고지의 호주군과 677고지의 캐나다군을 공격했지만, 호주군과 캐나다군은 기적적인 선전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중공군의 예봉을 꺾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가평군 골짜기를 따라 진격하여 서울-춘천 도로를 차단하려 했던 중공군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고 물러납니다. 즉 가평 전투는 중공군의 유엔군 분할 기도를 좌절시키고 서울 재함락을 막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기적의 전투였습니다. 설마리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의 펑더화이 사령관은 4 26일 마오쩌둥에게 공세 실패를 보고했고, 5차 공세는 불과 8일 만인 4 29일에 종결되고 맙니다. 지금도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에 가면 호주군이 가평 전투에서 사용했던 총, 수류탄, 군복 등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1951 4월은 한국전쟁의 전선이 요동쳤던 시기였지만 한국군과 유엔군의 지휘부에 굵직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한국군에서는 3 28일 헬기 사고로 전사한 김백일 장군의 후임으로 4 7일 백선엽 장군이 제1군단장에 취임했고, 4 11일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고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미8군 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중장이 취임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후 정전협정 때까지 전쟁을 이끌었고, 귀국 후에도 한국군 육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미군의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장군과 한국군의 김백일백선엽 장군은 진실로 당대 최고의 명장들이자 6·25의 영웅들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