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북한 출신 국민가수 현미 별세하다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3.04.19
[김태우] 북한 출신 국민가수 현미 별세하다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5세. 사진은 1998년 4월 9일 중국 장춘의 한 호텔에서 울면서 이야기하는 동생 김길자씨의 눈물을 닦아주는 현미 씨.
/연합뉴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임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 북한 출신 국민가수 현미 여사가 부른밤안개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그 현미가 향년 85세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4 4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숨을 거두었습니다.

 

본명이 김명선인 현미는 1938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평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던 중 6·25 전쟁을 맞았고 1951 1·4 후퇴 때 5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현미는 스무 살이던 1957, 8군 위문공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가수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962년 호소력이 넘치는 허스키 목소리로밤안개를 불러 일약 스타로 부상했습니다. 이후 현미는 당시 최고의 작곡가인 이봉조 씨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내 사랑아,' '떠날 때는 말없이,' '보고 싶은 얼굴,' '무작정 좋았어요,' '애인,' '몽땅 내 사랑,' ‘바람,‘ ’아내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면서 국민가수로 성장했습니다. 1980년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파티에서 열창하여 기립박수와 앙코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현미는 재즈, , 트로트 등 가요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며 국민 스타가 되었고, 79세이던 2017년에도내 걱정은 하지마라는 신곡을 발표할 만큼 노익장을 자랑했습니다. 현미는 이미자, 한명숙, 패티 김 등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동료가수들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노래만큼이나 화려한 입담과 유머로 주변을 즐겁게 했습니다. 현미는 사망 전날인 4 3일에도 지인들과 점심을 나누고 대구에 가서 노래교실 공연을 했으며 다음 날에도 지인들과 점심 약속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현미가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두 아들이 급거 입국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장례식은 11, 서울 동작구의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습니다. 장례식장은 각계의 조문객들과 추모방송을 위해 달려온 방송사 기자와 방송장비들로 넘쳐났고, 엄앵란, 김흥국, 설운도, 서수남, 정훈희, 한상진, 하춘화, 노사연 등 남여 노소를 막론한 수많은 동료·후배 연예인과 가수들의 흐느낌이 이어졌습니다.

 

현미는 북한에서 내려와 한국에서 가수로 대성한 분이지만, 송해 선생과 마찬가지로 평생 이산의 한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북한에서 내려와 최고령 가수이자 연예인으로 활동하다가 작년 6월에 작고한 송해 선생도 평생 고향에 남겨둔 어머니와 여동생을 그리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년 6월에 눈을 감았습니다. 현미의 아픔도 송해 선생 못지않았습니다. 현미는 13세이던 1951년 공산치하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할머니 댁에서 지내고 있던 여동생인 9살짜리 명자 씨와 6살짜리 길자 씨를 데려오지 못하고 생이별을 했습니다. 그 후 47년의 세월이 흐른 1998년 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중국 장춘에서 길자 씨와 감격적인 재회를 했는데, “왜 나를 버리고 갔느냐는 동생의 울음 섞인 항변에 가슴이 메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초췌했던 동생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또 다시 20년이 흐른 2018년 현미는 KBS-TV아침마당프로그램에 출연하여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도록 문이라도 열어주면 좋겠다며 북한을 향해 호소했습니다. 2020년에는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가 이산가족들의 기억을 더듬어 가상으로 화면 속에 고향을 만들어 놓고 방문하는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는데, 이때 현미는 가상의 고향집을 둘러보다가명자야, 길자야! 나는 눈물이 나서 아무 것도 안 보인다라며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말았습니다. 현미는 북에 두고 온 두 동생이 생각날 때면 자신의 히트곡밤안개보고싶은 얼굴을 부르면서 회상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 똑같은 그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 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즐거웠죠. , 그 밤이 꿈이었나.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다한 말 가슴에 삭이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현미의 또 다른 히트곡떠날 때는 말없이의 가사입니다. 현미는 그렇게 말없이 갔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가족을 그리면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산가족이 많이 생존해 있지만, 북한정권은 체제유지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연일 미사일을 쏘고 남쪽을 향해 핵위협을 가하는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이라도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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