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윌리엄 웨버 대령과 원주 전투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2.04.20
[김태우] 윌리엄 웨버 대령과 원주 전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1일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 공원에서 열린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에서 참전용사 윌리엄 웨버 예비역 육군 대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지난 4 9일 또 한 분의 6∙25 참전 미군의 영웅인 윌리엄 웨버(William Bill Weber) 예비역 육군 대령이 향년 97세로 메릴랜드 캐롤카운티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아는 재미 한인사회는 큰 슬픔에 빠졌으며,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애도를 표했습니다. 황 보훈처장은 추모패와 함께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웨버 대령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조전을 보냈고, 윤 당선인도 페이스북을 통해 유족에게 애도와 경의를 표했습니다.

 

웨버 대령은 1925년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1943년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동안 11공수대대 소속으로 필리핀에 배속되었으며 종전 무렵에는 일본의 군수기지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 강제노역자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기도 했습니다. 1950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 187 공수부대 소속 육군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고, 이후 강원도 원주에서 공산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는 부상을 당했으며, 퇴원 후에는 한 팔과 한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현역에 복귀했던 참군인이었습니다.

 

원주 전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습니다. 당시 웨버 대령과 함께 미 187 공수여단에서 싸웠던 콜맨(J.D. Coleman) 예비역 중령은 2001년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 「Wonju-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에서 원주 전투를 한국의 게티스버그 전투라고 했습니다. 원주 전투가 한국을 구한 전투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직전까지 전쟁 양상은 유엔군 측에 불리했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이후 궤멸상태로 북쪽으로 패퇴한 북한군을 도와 참전한 중공군이 세 차례의 대공세를 통해 다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던 상황이었습니다. 1950 10 25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청전강 이남으로 밀렸고, 11 25일 시작된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했는데, 미 제2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에서 포위되었다가 흥남을 통해 해상 철수했습니다. 12 31일 시작된 3차 공세로 1951 1 4일 서울이 다시 공산군의 손에 들어갔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안성을 연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이 무렵 중공군과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은 한반도 중동부의 교통 요충지인 원주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대전과 대구로 향하는 돌파구로 삼고 유엔군의 동서 간 연결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원주가 6·25 전쟁의 핵심적인 승부처가 된 것입니다.

 

1950 12월에서 1951 1월에 걸쳐 치러진 원주 전투는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모두가 사력을 다한 총력전이었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유엔군은 한국군 제3사단, 미 제10군단, 미 제1 해병사단, 미 제2사단과 7사단, 미 제5 기갑연대, 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연대, 그리스 부대 등이었으며, 공산군은 중국군 제42집단군과 제66집단군, 북한군 제2,3,5군단 등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뺏고 뺏기는 혈전 끝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군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1951 1 8일을 기점으로 중공군은 공세를 중단했고, 유엔군은선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 1951.1.25~1951.2.20)’을 통해 공세로 전환하게 됩니다. 다시 북진을 시작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수원-이천 방어선을 돌파하여 3 15일 감격적인 서울 재수복을 달성했습니다. 중동부에서는 횡성, 평창, 동해 등으로 진격한 한국군과 유엔군에 대해 공산군이 횡성과 지평리에서 반격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중공군은 물론 북한군 제5군단과 제2군단도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고, 더 이상 대공세를 펼칠 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웨버 대령이 팔과 다리를 잃은 원주 북쪽 324고지 전투는 이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1951 2월 영하 30도의 혹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반드시 그를 살려야 한다는 미군 최고위층의 명령에 따라 웨버 대령은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후송되었고, 이후 1년 동안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았습니다. 퇴원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역에 복귀하여 인공 팔과 인공 다리를 동시에 착용한 유일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웨버 대령의 한국 사랑은 1980년 예편 후에도 대를 이어 계속되었습니다. 웨버 대령은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6·25가 자유진영이 공산진영의 무력에 맞선 첫 전쟁이라는 전쟁의 본질과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계속했고, 그의 딸 배스 웨버와 손녀 데인 웨버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를 따라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제막식 등 여러 참전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석하면서 6∙25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손녀 데인 웨버는할아버지는 팔과 다리를 잃었지만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싸웠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웨버 대령의 명복을 빌면서 다시 한번 한반도판 게티스버그 전투였던 원주 전투를 회상해 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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