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1951년 5월 중공군의 제6차 공세와 현리∙용문산 전투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3.05.10
[김태우] 1951년 5월 중공군의 제6차 공세와 현리∙용문산 전투 사진은 6·25전쟁 당시 단장의 능선 전투 모습.
/연합뉴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오늘은 1951 5월의 6∙25전쟁을 되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951 4월 중공군의 제5차 공세로 유엔군의 전선은 다시 뒤로 밀리지만 유엔군은 4월 설마리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반격에 들어가 6월 중순에는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을 잇는와이오밍선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 있었던 것이 중공군의 제6차 공세였습니다. 중공군은 5 16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으로 전 전선에서 제6차 공세를 펼쳐 한국군 제5사단과 7사단, 한국군 제3군단 예하의 3사단과 9사단, 1군단 산하의 수도사단 등을 공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후퇴와 반격을 반복해야 했는데 현리 전투, 용문산 전투 등은 1951 5월에 치러진 대표적인 전투였으며, 현리 전투는 6∙25전쟁 동안 한국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였습니다.

 

현리 전투는 1951 5 16~22일 제6차 공세를 통해 중공군 및 북한군 3개 군단이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방면으로 남진하여 한국군 제3군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입니다.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3군단은현리 철수작전을 통해 인제군 기린면 현리와 방태산을 거쳐 남쪽으로 패주하게 됩니다. 중공군 제20군단과 27군단 그리고 북한군 제5군단은 인제 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제3군단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고, 특히 중공군은 한국군 제3군단의 보급로이자 공산군이 남진하는 길목이기도 한 오마치 고개를 지키던 한국군 제7사단과 격돌하게 됩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한국군 제7사단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 퇴각해야 했고, 한국군 제3군단의 제9사단과 제3사단 병력들은 고위 지휘관들이 먼저 철수하는 바람에 지휘체제가 붕괴된 가운데 대혼란 속에서 패주해야 했습니다. 이에 5 26일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3군단을 해체했고, 한국군 1군단도 미8군의 예하부대로 편입시켰습니다. 1950 10 16일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던 과정에 창설되었던 한국군 제3군단은 현리 전투에서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잃거나 포로로 잡힌 가운데 8개월 만에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던 것입니다중공군 입장에서 보면 현리 전투는 제6차 공세를 통해 거두어들인 최대 전과였습니다.

 

용문산 전투는 같은 시기인 5 16~23일 한국군이 양평군 용문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한 승리한 전투였는데, 이 승리의 주역이 4월의 중공군 제5차 공세 때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에서 패배한 후 이곳에 재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6사단은 북한강을 도하하여 넘어 오는 중공군 제19병단 소속 3개 사단을 맞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혈전을 벌여 고지들을 고수했고, 결국 5천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기록하면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창리에서 당했던 치욕을 깨끗하게 설욕한 것입니다.

 

1951 5월의 전투상황을 다시 한번 요약해보겠습니다. 4월 동안 설마리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던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개시하여 잠시 동안 전선을 남쪽으로 밀어냈지만, 기세는 일주일 밖에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중공군은 5 17일 서부전선에서 그리고 5 19일 청평, 가평, 춘천 등 중부전선에서도 공세를 취했지만 유엔군 측의 반격에 막혀 5 23일부터 전 전선에 걸쳐 후퇴를 시작합니다. 이후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5 26일 양양을 점령하고 27일에는 현리와 인제를 되찾았으며 28일에는 화천 그리고 29일에는 간성을 점령합니다. 그리고는 5월말에 세 번째로 38선을 회복하고 6월 중순에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을 잇는 방어선을 회복합니다. 이렇듯 1951 5월은 유엔군과 중공군이 뺏고 뺏기는 사투를 이어가면서 전선이 남북으로 춤을 추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유엔군은 물론 중공군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인명피해를 강요하여 양측에게 휴전협상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인해전술을 즐겨 사용했던 중공군의 인명피해가 더욱 막심했기 때문에 중공군은 이후 약 2년 동안 이렇다 할 대공세를 펼치지 못했으며, 정전협정을 앞둔 1953 5월에 가서야 마지막 공세인 제7차 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951 6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말리크가 휴전협상을 제안하여 드디어 협상이 시작되지만 전쟁은 이후에도 2년이나 더 지속되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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