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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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실무접촉이 거듭되면서 양쪽에서 각자의 선물보따리들을 조금씩 풀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양보를 유도하기 위한 샅바 싸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한미 공군이 실시하고 있는 맥스선드(Max Thunder) 연합훈련을 시비하면서 5월 16일 예정되었던 남북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시켰습니다. 미북 실무접촉에서 북한이 미국이 원하는 강도와 방식의 비핵화 방안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이 주된 이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양측이 대화의 틀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이 워싱턴이 원하는 방식으로 핵을 폐기하면 ‘북한을 정상국가로 대접하고 주민들이 고깃국을 먹도록 해주겠다“고 흘리자, 북한은 억류 중이던 미국 국적의 한국인 세 명을 석방하고 23일에서 25일 사이에 풍계리의 핵실험장을 폐기하겠다고 밝혔으며 이어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할 의사도 내비쳤습니다. 한국의 통신·방송기자 8명을 포함한 외국 언론인들을 초청하여 폐기 현장을 참관토록 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은 일단 환영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핵폐기로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북한이 2008년에 연출했던 5MW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와 같은 정치쇼에 그쳐서는 안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원산에 프레스센터를 설치하고 전용기로 외국인 기자들을 베이징에서 원산까지 실어 나르겠다고 한 것은 나름 합당한 조치로 보입니다. 원산에 여객기가 착륙할 시설이 있다는 점이 공식 이유이겠지만, 제재 해제를 염두에 두고 관광지 조성 사업이 한창인 원산-갈마 지역을 홍보하겠다는 의도도 담겨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핵실험장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물리적 여건이 핵실험장 자진 폐쇄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수폭 실험으로 핵실험장 내부가 붕괴되어 추가적 사용이 어려워졌을 수 있고, 수십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책, 화대, 화성, 명천 등 도시들이 있어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 국경과 10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점이나 130km 거리에 있는 백두산의 화산 폭발을 유발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닙니다.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는 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을 배제한 가운데 폐쇄와 동결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둘러 현장을 폐기하겠다는 것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수많은 비밀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그토록 방대한 지하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어디서 어떤 인력을 동원하여 얼마 동안 공사를 진행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근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당장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핵실험장은 어떤 핵물질을 사용하여 어떤 핵무기를 만들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증거물들이 쌓여 있는 북핵 검증 자료들의 보고(寶庫)이며, 인근 지역의 방사능 오염 여부와 피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시료들도 수두룩합니다. 핵폭발이 방출하는 방사능 물질은 세슘, 요드, 제논, 스트론튬 등 수백 가지에 이릅니다. 이런 물질들이 식수를 통해 몸에 들어오면 폐암, 갑상선암, 백혈병, 골수암, 불임증 등 각종 불치병을 유발하며, 배설이나 목욕으로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극소량이 체내에 축적되더라도 장기간 악영향을 미칩니다. 현 시점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이 폐기되고 접근이 불가능해지면, 핵실험 현장 사찰을 통해 핵무기 개발과정이나 핵오염에 대한 사후 검증을 실시하는 것은 영구히 불가능해질 것이며, 핵실험장 건설 과정에서 빚어졌을 지도 모르는 인권유린의 증거물들도 매몰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북한이 대미 핵협상을 앞둔 시점에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서둘러 핵실험장을 폐기하려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에게는 새로운 핵합의 이후에도 여전히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는 의미이며, 이는 미북 간 핵폐기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완전한 핵폐기가 아닐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실험장 폐기가 축포를 쏘고 박수를 치는 축하행사로 그쳐서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한미 정부와 관련자들은 이런 관전 포인트를 가지고 핵실험장 폐기 과정을 치밀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며, 북한 역시 국제사회가 가진 이런 정당한 의심들을 불식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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