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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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13가 1500번지에 가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구식 건물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데 걸어서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공관인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입니다. 이곳은 망국(亡國)의 한이 서린 곳이자 한국과 미국 간의 관계가 싹트기 시작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조선과 대한제국이 파견한 한국인 외교관들이 사용하던 탁자와 책상들이 복원되어 있고, 벽면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조선이 미국과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1882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듬해 미국은 지금 미 대사의 관저가 있는 정동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 공사로 루시어스 푸트(Lucius Harwood Foote)를 파견합니다. 가난하고 낙후한 소국이었던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벌이는 세력경쟁에 부대끼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에 미국과 수교하여 보빙사를 파견하여 외교활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1887년에 초대 주미 공사인 박정양을 파견하고 바로 이 건물에 공사관을 설치하게 됩니다. 이 무렵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침략위협과 함께 청나라의 종주국 놀음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면 그 공사는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중국 공사에게 가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외교관들의 행사에서 조선의 공사관은 청나라의 외교관보다 아래쪽에 위치해야 한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박정양은 1887년 8월에 부임해서 귀국하던 1889년 2월까지 청나라의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직접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했습니다.

이후 고종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게 됩니다. 을미사변이란 호시탐탐 한반도를 탐내던 일제의 지시로 일본군 한성 수비대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조선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직후 러시아는 자국의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백 명의 수병들을 파병했고, 이를 계기로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896년 1월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거처하게 되는데,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릅니다.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던 고종은 1897년 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릅니다. 그렇게 해서 워싱턴의 조선 공사관은 대한제국의 공사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고, 1910년에 나라를 통째로 합방함에 따라 대한제국은 13년 만에 망국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도 일제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이 건물을 단돈 25달러를 받고 매각함으로써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1945년 대한민국은 독립을 쟁취했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면서 미국에서 동포사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한이 서린 이 건물을 다시 사들이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운동에 정부가 동참하면서 한국 정부는 2012년 300만 달러를 주고 이 건물을 다시 매입했는데, 이로서 대한제국의 주미 공관은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지 102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후 한국 정부는 대한제국 당시의 빛 바랜 사진들을 놓고 철저한 고증을 거치면서 수년에 걸쳐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를 벌였고, 마침내 2018년에 건물을 다시 개관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이 건물은 문화재청(Cultural Heritage Adm.) 산하 국외소재문화재단(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이 관리하는 기념관이 되어 한반도의 아픈 역사를 알고자 하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반 한국의 아픈 역사들을 간직한 곳이지만, 한미관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이 서방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조선국 군주와 아메리카 대통령 그리고 그 인민은 각각 모두 영원히 화평하고 우호를 다진다. 만약 상대국가가 불공평하고 경시당하는 일이 있으면 한번 통지를 거쳐 반드시 서로 도와주며 중간에서 잘 조정해 두터운 우의와 관심을 보여준다" 라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 그리고 남북 분단, 1948년 남한에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9년 한미 수교 및 대사관 교환 설치, 6.25 전쟁 발발과 미군의 참전, 1953년 한미동맹조약 체결, 한국군의 베트남전 및 중동 참전 등을 거치면서 한미 양국은 혈맹관계를 다져왔으며, 한국은 서방국가의 일원으로 동맹이 제공하는 안보방패와 안정성을 바탕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워싱턴의 메사츄세트가 2450번지에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은 대한민국의 해외공관 중 최대 규모이며, 한국은 로스엔젤레스, 뉴욕, 호놀루루,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애틀란타, 시애틀, 보스톤 등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있으며, 댈러스, 앵커리지 등에 출장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수백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제2의 조국이며 양국 간 매년 수백만 명이 왕래하는 가까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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