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회상하며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8.08.22

8월이 되면 대한민국 국민은 광복과 건국을 회상합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한반도가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되어 광복을 찾았고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8월이 되면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이 도발한 도끼만행 사건(Axe Murder Incident)입니다. 당시 미군은 유엔군측 초소들 간의 시야를 막고 있던 미루나무의 가지를 쳐내는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측 제5관측소는 유엔군측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유엔군측 제3 초소는 북한군 측의 3개 초소에 둘러싸여 있는데다 문제의 미루나무가 시계를 막고 있어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당일 오전 10시경 미군의 아서 보니파스(Arthur George Bonifas) 대위와 마크 배럿(Mark Thomas Barrett) 중위를 위시한 미군과 한국군 등 유엔군측 십여 명의 장병들이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감독·경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박철 중위가 인솔하는 북한군 십여 명이 나타나 작업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미루나무의 위치가 유엔군 측의 관할에 속했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중대장 직권으로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인근 초소에 근무하던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이용하여 도착했습니다. 보나파스 대위가 작업 중지 요구를 재차 거부하자 박철은 공격명령을 내렸습니다. 북한 군인들은 트럭에 싣고 온 곡괭이와 몽둥이를 꺼내 들었고 한국인 노무자들이 작업을 위해 가져온 도끼들을 빼앗아 휘둘렸습니다. 이들은 미군에게 집중 공격을 가하여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에게 중상을 입혔고, 미군 부사관과 병 4명 그리고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및 병 4명에게도 중경상을 입혔으며, 유엔군 트럭 3대를 파손했습니다. 머리에 도끼를 맞은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는 이송 중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 백악관은 즉각 특별대책반을 소집했고 "이 사건의 결과로 빚어지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곧 이어서 폴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을 개시했습니다. 이 작전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통째로 베어내고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군이 설치한 불법 바리게이트 등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엔군은 공격준비태세를 의미하는 데프콘 2를 발령했고, 미 본토에서 출격한 F-111 전투기 20대, 괌에서 이륙한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F-4 24 대 등을 한반도로 급파했습니다.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항모 미드웨이호도 호위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한국 해역으로 왔습니다.

이렇듯 미국이 일전불사의 자세로 나오자 북한은 일체의 대응을 자제한 채 침묵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군이 폴버니언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한국군도 일전불사의 태세로 '번개' 작전에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특전사령부에 단호한 보복을 명령했고, 이에 제1공수특전여단은 64 명의 특전사 대원들로 결사대를 편성하여 보복에 나섰습니다. 스틸웰 유엔군 사령관은 미루나무 절단은 미군이 맡고 한국군에게는 경호를 맡아달라고 요구하면서 몽둥이 외의 무기는 휴대하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으로부터 북한군이 분계선 남쪽으로 넘어오면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한국군 결사대는 M16 소총, 수류탄, 크레이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계급장과 명찰을 떼고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미군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동안 한국군 결사대는 유엔군측 3초소 부근에 위치한 북한군 측 6초소와 7초소를 박살냈고 이어서 5초소와 8초소도 부셔버렸습니다. 당시 북측에는 150여 명의 북한군이 대진하고 있었지만 미군과 한국군의 분노에 찬 보복작전을 지켜만 볼뿐 나서지 않았습니다. 폴버니언 작전이 종결되자 마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유엔군 측에 '유감성명'을 전달하면서 잘못을 인정했고, 미국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하마터면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었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유증은 컸습니다. 남북간 군사긴장은 더욱 고조되었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되었으며, 공동경비구역에도 경계선이 설정되었습니다.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진 작은 분단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 미군은 부근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Camp Kitty Hawk)를 캠프 보니파스로 개칭했습니다. 전 세계가 경악한 도끼 만행으로 희생된 보니파스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군은 매년 8월 18일이 되면 캠프 보니파스에서 간단한 추모행사를 가집니다. 북한은 북한식으로 이 날을 기억합니다. 도끼만행 사건 40주년이 되던 2016년 8월 북한의 로동신문은 "미군의 야만적인 행동을 우리 인민군이 제지하려고 하자 미군들이 갑자기 도끼를 휘두르면서 이리떼처럼 공격했다"고 적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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