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노병들이 기억하는 1950년 9월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9-09-25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9월이 되면 한국전쟁, 6•25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과 미군의 노병들은 인천상륙작전과 경인지구 전투 그리고 서울 수복 전투를 떠올리며 포연 가득했던 그날들을 회상합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남침 후 4일 만에 북한군의 후방에 상륙해 병참선을 차단하고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고, 이 전략은 1950년 9월 15일 실행됐습니다. 후일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인천지역을 방어하던 북한군 제884군부대가 예하 대대에 내린 1950년 8월 29일자 전투명령을 보면 “적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 덕적도, 영흥도 일대에 함선들을 체류시키고 있으므로 본 대대는 월미도 제방에서 염전까지의 해안에서 적을 결정적으로 격퇴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북한군도 연합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실제로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제18사단과 해군 및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으로 방어부대를 편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은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7만 5천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는데, 여기에는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7사단, 한국 육군 17연대, 한국 해병 3개 대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작전에 선봉을 맡은 것은 한미 해병대였습니다. 한국 해병 대대들이 미 해병 1사단의 각 여단에 배속되어 한미군은 한 몸이 되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는데, 양국 해병대는 상륙작전 개시 직전인 9월 11일부로 합류되어 ‘형제 해병’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상륙군은 월미도의 녹색해안, 인천역 서북방 해변의 적색해안, 인천 남쪽 염전지대 밑의 청색해안 등 세 곳의 해안을 통해 상륙해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혼란에 빠진 방어군을 섬멸한 상륙군은 신속하게 동진을 계속했습니다. 9월 17일 미 해병1사단 5연대는 김포비행장을 점령했고, 한국 해병대는 김포반도에서 섬멸전을 전개했습니다. 9월 20일 상륙군이 한강을 도하하고 서울 시가전이 시작되면서 양국의 해병대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습니다.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 1연대는 영등포를 압박했고, 레이몬드 머레이 중령의 제5연대는 행주나루터에서부터 서울을 압박했으며, 신현준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수색을 거처 104고지와 북한군 잔당들의 마지막 방어 거점이었던 연희고지로 향했습니다.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 1대대와 미 해병 5연대는 긴밀한 협력 속에 9월 21일 북한군 제25여단과 제78독립연대를 격파하고 9월 21일에 104고지, 9월 22일에 영등포, 9월 24일에 연희고지 등을 탈환했는데, 9월 23일 북한군에게 후퇴명령이 내려집니다. 서울에 진입한 한미 해병대는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북한군 잔류부대들을 소탕하여 26일에는 남대문과 서대문 일대를 탈환했으며 결국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박정모 소위와 소대원들에 의해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고 정오에 국회의사당에서 감격의 환도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전투에 참전했던 노병들은 9월 15일 당시 인천 앞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미국 함정들, 함포사격의 폭음, 굉음을 내면서 벌떼처럼 인천과 서울의 상공을 누비던 미 공군기 등을 기억한다면서 미국의 거대한 힘을 느꼈다고 회상합니다. 또한 이들은 미군 지휘관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구타하거나 학살하지 말고 제네바협정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부역자들은 군이 처벌하지 말고 경찰에 넘기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노병들이 기억하는 또 한가지는 북한군 치하 90일간 서울에서 벌어진 참상들이었습니다. 서울은 성한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쑥대밭이 되었고, 부모 잃은 고아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북한군이 애국인사, 정치인, 학자, 신부, 목사, 법조인, 기업인 등 3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사슬에 묶어 북쪽으로 끌고 갔고, 이중 상당수는 끌려가면서 학살당했습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줄에 묶인 채로 처형당한 구덩이들이 널려 있었고, 시신을 수습하는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생존 노병들의 뇌리에는 1950년 9월에 있었던 일들이 엊그제의 일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