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피로 물든 1950년 9월

김태우·동국대 석좌교수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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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을 보내면서 6.25 전쟁을 경험한 남과 북의 노병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번쯤 곱씹어 볼만한 화두입니다.

얼마 전인 9월 15일, 한국군은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 인천상륙작전 65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란 1950년 낙동강 전선에서 싸웠다가 살아 남은 북한의 노병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기억일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던 시점에 갑자기 전쟁의 판도가 뒤바뀌면서 정신 없이 북쪽으로 패주해야 했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반면, 한국과 미국의 노병들에게 있어 1950년 9월은 피로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1950년 9월은 피로 물든 한 달이었습니다. 6월 25일 기습적인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아무런 전쟁준비도 없이 방심하고 있던 한국군을 일사천리로 밀어 부쳐 사흘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고, 전쟁 발발 40일만에 낙동강 남쪽의 경상북도 및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토의 90%를 점령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이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에게 있어 낙동강 전선은 무력적화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대구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로 가라는 무초 당시 미국대사의 요청을 뿌리치고 낙동강 방어선의 사수(死守)를 독려했습니다. 미국은 낙동강 전선을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는 방어선으로 보고 있었고,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한국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950년 8~9월 당시 낙동강 전선에는 김책 전선사령관 휘하의 북한군 13개 사단이 집결해 있었고, 이에 대항하는 한국군은 5개 사단이었고 미군은 3개 사단이었습니다. 신속하게 부산까지 밀고 가서 전쟁을 끝내라는 김일성의 재촉을 받고 있던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미군 사이에 처절한 결전이 벌어졌지만, 북한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대구 북방 22km 지점의 다부동에서는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맹공을 막아냈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2만 명의 북한군 사상자과 1만여 명의 한국군 사상사를 낸 처절한 전투였습니다. 영천에서는 유재흥 장군이 압도적인 숫적 우세를 앞세운 북한군을 물리쳤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한 한국군의 필사적인 항전은 포항, 안강, 경주 등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공군력은 6.25 전쟁 내내 엄청난 역할을 해냈습니다. 지상에서의 우세와는 달리 북한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유엔군에 빼앗긴 상태로 전쟁을 수행했는데, 미 공군기들은 길어진 북한군의 병참선을 쉴 사이 없이 폭격했습니다.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8월 16일 미 공군은 100여 대의 B-29폭격기를 동원하여 왜관의 북한군 집결지를 초토화시켰는데,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의 융단폭격이었습니다. 이렇듯 북한군이 평양의 재촉에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지쳐가던 중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자 북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에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에는 8개 참전국이 제공한 261척의 선박들이 동원되었고 여기에는 미 제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상륙한 7만 명의 한국군과 유엔군은 단숨에 인천과 서울을 수복하고 북에서 남으로 길게 늘어진 북한군의 병참선과 수송로를 차단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자신들이 고립되었음을 알아차리고 9월 하순부터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패잔병 신세로 전락하여 북으로 후퇴한 북한군은 대개 7만여 명이었지만, 이중에서 38선까지 도달한 병력은 3만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1만 명은 후퇴과정에서 전사했고, 1만 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나머지 2만 명은 퇴로를 차단당하여 게릴라로 변신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좇으면서 10월 2일 38선을 돌파했고, 1950년 11월 중순에는 초산, 혜산진, 청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유엔군은 다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전쟁이 중부전선에서 교착되면서 현재의 휴전선을 경계로 1953년 정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남과 북에는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피로 물들었던 1950년 9월을 기억하는 노병들이 생존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날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후진들에게 전수되고 있지만, 북한은 자신들이 저지른 파렴치한 침략전쟁을 성스러운 ‘조국통일전쟁’으로 왜곡·변질하여 체제선전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노병들이 사라진 이후 북한에서 전쟁의 진실된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9월을 보내면서 1950년 당시 낙동강 방어전에 참전했던 한미 양국의 노병들은 포연으로 가득찬 강과 피냄새가 진동하던 들녁을 떠올리면서 감회에 젖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아직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은 한국의 전쟁 역사가들이 누리고 있는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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