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장쩌민 전 주석의 별세와 중국 파벌정치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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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백혈병 투병 끝에 향년 96세로 별세했습니다. 시진핑(習近平) 정부의 코로나 봉쇄 정책에 저항하는 시위가 확산되는 중이라 중국 정부도 무척 민감해 하는 것 같습니다. 장쩌민은 1926년 상하이 인근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扬州市)에서 출생하여 21세가 되던 1946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7년에 ‘상하이의 MIT’로 불리는 상하이교통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청년시절에는 식품회사 경리, 소련 유학 등을 거쳤고 1980년 귀국 후 국가수출위원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1985년에 상하이 시당 부서기 그리고 1987년 시당 서기가 되면서 정치무대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후 최고 통치자 덩샤오핑(鄧小平)에게 후계자로 발탁되어 정치국 상무위원을 거쳐 1993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1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습니다. 덩샤오핑은 1989년 텐안먼(天安門) 사태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하이의 민주시위를 진압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고 합니다.

1993년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 그리고 국가주석이라는 3대 요직을 차지한 장쩌민은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경제적으로 개혁적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 중국을 통치했습니다. 장쩌민은 파룬궁을 탄압하고 대만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으며 상하이 시위 관련자들을 사형시키는 등 공산당 이념에 반하는 민주주의 운동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을 계승하여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장쩌민은 2001년에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HO)에 가입시키고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에는 협조를 약속하여 미국이 중국을 협력 대상국으로 여기도록 만들었으며, 주변국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 시절 동안 1992년에 수교한 한·중간의 인적·물적 교류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장쩌민의 정치적 성공과 함께 등장한 것이 ‘상하이방’이라는 정치파벌이었습니다. 중앙무대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장쩌민은 주룽지(朱鎔基) 총리,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칭린(賈慶林) 정치협상회의 주석, 장더장(張德江) 국무원 부총리 등 상하이 출신의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로 중앙 요직을 채웠는데, 이들이 상하이방이었습니다. 중국에는 공산당 고위직의 자녀 출신으로 구성된 태자당과 공산당 청년조직 출신들로 구성된 공청단이라는 두 개의 정치파벌이 있었지만, 상하이방의 출현으로 세 개의 파벌이 권력을 분점하는 체제가 된 것입니다. 장쩌민은 2003년 공청단 출신의 후진타오가 집권한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상하이 당서기를 지낸 시진핑(習近平)을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밀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시진핑의 집권과 함께 파벌체제는 급속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공산당 중앙기율위원회가 부패척결을 앞세우고 상하이방 및 태자당 인사들을 숙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저우융캉(周永康) 상무위원,인민해방군 서열 1, 2위였던 궈보슝(郭伯雄)과 쉬차이허우(徐才厚) 등이 숙청되었습니다. 금년 10월 제 20차 당대회를 계기로 리커창(李克强) 총리, 왕양(汪洋) 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공청단 인사들도 사라지고 대신 ‘시자쥔(習家軍)’으로 불리는 시진핑 직계세력들이 당군정 요직들을 완전 장악한 것입니다. 10월 22일 당대회 폐막식 도중에 후진타오 전 주석이 강제 퇴장당하는 순간 공청단은 와해된 것이며 이번 장쩌민의 별세로 상하이방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는 권력자 1인이 세계 2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중국을 장악한 현실을 바라보는 내외의 시각들은 복잡합니다. 중국내 민주화 요구가 확산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독재 강화로 기업활동 및 외국의 중국 투자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중국의 대만 침공 또는 북핵 두둔 강화로 인한 긴장 고조를 걱정하는 분석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시진핑 정부가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쩌민의 별세가 현 중국내 시위사태에 미칠 영향인 것 같습니다. 1989년 민주화 요구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다 실각했던 후야오방(湖耀邦) 당 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학생과 노동자들에 의해 톈안먼 사태가 시작되었음을 중국 정부도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진핑 정부는 7백여 명의 대규모 장례위원단을 발표하는 등 장쩌민 주석의 장례 절차를 시작하면서도 장례를 계기로 민주화 요구가 터져 나올 가능성을 고민하는 눈치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