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7.27은 반성의 날

김현아· 대학교수 출신 탈북민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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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해마다 7.27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역시 전승절을 맞으며 여러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미국이 일으켰다고 할 뿐 아니라 창건된지 2년밖에 안되는 청소한 공화국이 미국을 타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8.15와 함께 7.27을 제2 해방의 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북한의 이러한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국제사회는 물론 북한에도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6.25전쟁의 도발자가 북한지도부라는 것은 북한주민만 모를 뿐 국제사회에서는 기정사실로 되고 있습니다. 6.25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없는 전쟁입니다. 6.25전쟁은 이데올로기가 상반된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 같은 형제, 같은 친구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피를 흘린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서로 총을 겨눈 군인들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에 세뇌되어 동원된 데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비록 북한이 일으키고 남한이 방어했지만 실제로 싸운 것은 미국과 중국군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중국군대는 100만이 넘었고 미국을 비롯한 16개 국가에서 60여만의 군대가 참전했습니다.

인민군대가 압록강주변까지 후퇴한 후 중국군대가 참전을 결정한 이후 전쟁을 지휘한 것은 중국의 팽덕회 사령이었습니다. 반공격과 진지방어전은 중국군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전선의 대부분을 중국군이 장악했고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극히 일부분만 차지했습니다. 전쟁시기 전선을 지휘한 팽덕회 총사령과 김일성의 사이의 불화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대규모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나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군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팽덕회는 중국 국내전쟁을 치른 지휘관이었습니다. 팽덕회는 김일성에게 지휘권을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그로 인해 팽덕회를 좋아하지 않았고 전선사령부도 2번밖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중국군이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지 않고 38선 부근에서 진지방어전으로 넘어간데 대해서도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팽덕회는 중국군이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무분별한 공격은 중국군에 큰 손실을 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미국은 오랜 대치 끝에 정전을 결정했습니다.

사실 김일성은 전쟁 발발과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선에서 물러난 김일성은 후방에서 당내 정치에 전념했습니다. 결과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던 남로당을 미국의 앞잡이로 몰아 숙청했고 패전의 원인을 그들에게 전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경험을 쌓아 전후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았던 연안파와 러시아파를 숙청하고 북한에서 독점적 지배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북측 47만명, 남측 19만명 총 66만명이 전사했고 부상자는 전사자의 배를 넘었습니다. 북쪽에서는 민간인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한은 42% 북한은 60%의 공장과 도로 항만 토지 저수지 등 산업기반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남북주민들의 적대감이 격화된 것은 물론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 적과 아군으로 갈라졌습니다. 천만세대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 중에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힌 내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7.27을 전승절로 크게 기념하고 있고 김일성을 미제를 타승한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6.25나 7.27은 기념하여야 할 날이 아니라 가슴 아프게 돌이켜보고 반성해 보아야 할 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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