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국의 북경에서는 제4차 6자회담이 한창 진행중입니다. 예정대로라면 작년 9월에 열렸어야 할 회담이지만, 북한 측이 이런 저런 이유로 회담을 거부하는 바람에 1년 만에 다시 열리게 된 것입니다.
현재의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밖에 없다는 데 남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 당사국들이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회담에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큰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제4차 6자회담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현재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27일에는 6자회담의 각국 대표들이 이번 회담에 임하는 자국의 기본입장이자 앞으로 북핵 위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조연설에서 북한대표가 밝힌 입장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북한은 이번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의무사항으로 (1)남한 내의 핵무기 철폐 및 핵무기 반입 금지, (2)핵우산 제공 철폐, (3)북?미간 신뢰조성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수립 그리고 (4)무조건적인 핵불사용 약속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내용들이 지금부터 12년 전에 북한 당국자들에 의해서 이미 여러 차례 표명된 바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은 지난 93년 3월 핵무기확산금지조약, 즉 NPT에서 탈퇴한 다음날인 3월 13일 당시 이철 제네바 주재 대사와 허종 유엔주재 차석대사를 통해서 NPT 복귀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었습니다.
첫째는 팀스피리트 한?미 군사훈련의 중지이고, 둘째는 남한내 미군 핵무기와 핵기지의 완전한 공개이며, 세 번째 조건은 북한에 대한 핵위협 해소였습니다.
이로부터 약 한달 후인 4월 19일에는 허종 차석대사가 미국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93년 4월 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한국에 대해서 주한미군 철수 의지를 표명하고 외국군대와의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며, 미국의 핵우산에서 탈피하도록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요구사항들은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 대표가 한 기조연설에 담긴 것들과 별다르지 않은 내용입니다. 이런 사실은 북한의 핵 전략이 시대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당이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한정권이 핵무기를 고리로 해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북한의 이러한 요구사항이 북한의 핵무기 폐기라는 6자회담의 본래 목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미국의 대남 핵우산은 한미 안보동맹의 핵심 사항이자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 핵우산을 철폐하라는 것은 한미 동맹을 해체하라는 요구로밖에 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무조건 적인 핵불사용 약속도 미국의 핵전략 내지는 군사전략 전체를 바꿔야 할 정도의 중대한 사안입니다.
아마 북한 당국도 이런 제안이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주장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6자회담을 통해서 북핵위기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문제를 야기한 당사자인 북한의 겸허한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국으로서의 권한을 주장하는 것은 회담에 난관을 조성할 뿐이라는 점을 북한당국은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