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훈 칼럼: 북한은 남북대화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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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훈

수해를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미뤘던 북한이 연인원 10만 여명이 동원되는 아리랑 축전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남쪽에서 보기에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북한 나름대로 사정은 있을 겁니다. 수해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막고 사회불안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잔치라도 벌여야 할 처지일 수도 있겠고, 북한방송의 보도대로, 많은 해외동포와 외국인들이 참관하기 때문에 일정을 바꿀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랑 축전은 어디까지나 북한 내부의 행사입니다.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수해에도 불구하고 내부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하는 북한이 어렵게 약속된 남한과의 정상회담을 연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의에 어긋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에 하나 북한의 형편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단 남한 측에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정상회담의 연기가 가능하겠는지 남측의 의사를 먼저 타진하고, 남측이 동의하는 경우에 새로운 일정을 상호 협의하는 것이 순리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10월 초로 사실상 새로운 날짜를 제시하면서 정상회담 연기를 요청했고, 남측이 이를 받아들여서 10월 2일이란 새로운 정상회담 날짜가 정해진 것입니다.

정상회담 일정을 재조정하는 모양새만 봐도 북한이 과연 남한처럼 남북대화를 중요시하고 있는지 의심을 갖게 됩니다. 북한의 진지하지 못한 자세는 남한 사회에서 정상회담 일정 변경에 대한 각종 의구심을 일으킴으로써,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회담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10월 초순이라는 날짜가 북한의 정치일정에서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회담이 끝난 지 바로 며칠 뒤인 10월 8일은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고, 그 다음날인 10월 9일은 북한의 핵실험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하루 뒤인 10월 10일은 노동당 창건 62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김정일이 마음만 먹으면 정상회담의 결과를 내부 정치행사에서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시점이 바로 10월 초순인 것입니다.

북한 당국은 남북관계를 미국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는 듯합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전 세계의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목표가 정상회담을 활용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미국 정부가 그만큼 초조해질 것이고, 그러면 북한이 원하는 대로 북미 관계를 요리할 수 있다는 게 아마도 북한 당국의 생각일 것입니다.

소위 ‘남한을 활용해서 미국으로 통하겠다’는 ‘通南通美’ 전략은 북한이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로 잘 써먹었던 전략입니다. 아시다시피, 제1차 정상회담이 열렸던 2000년 늦가을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이 이뤄졌고, 연말경에는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은 지금도 북미 관계를 그 당시로 복원하기를 바라고 있을 정도로, 2000년도의 통남통미 전략을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7년 전에 한 번 써먹었던 전략이 지금도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착각입니다. 전략 자체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북한의 상대방인 남한과 미국도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북한 당국이 지금도 남북관계를 미국으로 가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긴다면 남북대화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민족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깊은 고뇌와 상호공존과 번영에 대한 의지 그리고 대화에 임하는 진실성이 결여된 회담은 뜻 깊은 결실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북한당국의 대미, 대남 정치선전의 장으로서의 역할 밖에는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제2차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 당국은 지금까지 남북대화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해왔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