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칼럼] '다치아' 자동차의 성공
그렉 스칼라튜 ∙ 루마니아 출신 언론인
2010.10.26
2010.10.26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르노’는 루마니아 자동차 ‘다치아’를 인수하면서 가격이 저렴하고 안전한 소형 자동차를 생산하여 유럽연합, 중동,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다치아’가 경제 상황이 세계적으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좋음 품질과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실적을 올리고 있으며 ‘다치아’ 공장에서 일하는 루마니아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은 안전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치아’ 최초 SUV 즉 스포츠유틸리티 차량 ‘다치아 더스터’는 인기가 너무 좋습니다. SUV는 가벼운 트럭형의 몸체로 만들어져 4륜구동이 가능한 비포장도로에서도 주행할 수 있는 튼튼한 자동차입니다. 경주용 ‘다치아 더스터’는 모로코 사막에서 벌어진 ‘Rallye Aicha des Gazelles’ 경주에서 8팀중 1위, 2위와 5위를 차지했습니다. 빙판 위에서 벌어진 ‘Trophee Andros’ 경주에서 유명한 프랑스 출신 포뮬라 원 (Formula 1) 운전자 Alain Prost가 ‘다치아 더스터’를 운전하며 우수한 결과를 거뒀습니다. 1만2천유로부터 1만5천유로 사이의 가격으로 아주 저렴하여 ‘가난한 자의 SUV’라 별명이 붙은 ‘다치아 더스터’는 루마니아에서 1년에 약 15만 대나 생산되며 50%정도가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연합 나라에서 팔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러시아나 남미의 콜롬비아와 같은 해외시장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다치아 더스터’는 루마니아 국내시장에서도 현재 가장 잘 팔리는 한국산 ‘현대 투싼’ (Hyundai Tucson)을 추월할 예정입니다.
루마니아 ‘다치아’ 자동차의 역사는 개혁과 개방으로 부활한 루마니아 경제의 상징이라 볼 수있습니다. ‘다치아’는 기원 후 2세기에 로마제국으로 흡수되기 전 루마니아의 옛날 이름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시대 루마니아의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체스쿠 대통령은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북한식 독재 체제와 독재자 개인 숭배에 반한 나머지 루마니아식 ‘주체’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독재 정부는 연필부터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국내에서만 생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부는 자동차 기능과 모양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연구를 위한 투자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자동차인 '다치아'를 1960년대부터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진 1989년까지 차의 모양이나 기능을 거의 바꾸지 않은 채 30년 가까이 똑같은 구형차를 생산했습니다.
차우체스쿠 공산독재 시절 해외정보국 대장이던 미하이 파체파 장군은 1978년 서독으로 출장을 갔다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유명한 경제.사업 문제를 토론하는 미국 일간지 ‘Wall Street Journal’에서 2009년에 출판된 파체파 장군이 쓴 기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시대에 루마니아 자동차 산업을 설립하는 것은 해외정보국, 즉 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술을 훔치려는 간첩들의 대장이던 파체파 장군의 임무였습니다. 파체파 장군은 화학 전문가이며 자동차와 관련된 공부를 해본적은 없었지만, 루마니아가 공산국가가 되기 전에 아버지가 미국 자동차업체인 GM지사장이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때 루마니아 국내 시장에서 팔리던 ‘다치아’는 사이드미러나 라디오와 같은 기본 사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루마니아의 경제가 자유경제가 아니라, 중앙계획경제였고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은 국내 소비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를 사고 싶은 사람들은 주문을 한 후 생산력이 부족한 공장에서 차가 나올 때까지 2, 3년씩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1989년말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진 후 루마니아는 쉽지 않은 전환기를 극복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이 1980년대말과 1990년대초반에 공산권이던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시키려는 북방 정책을 구성해 러시아, 중국과 동유럽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설립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들도 1990년대 초반, 동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변화를 잘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라는 떠오르는 시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이 부활하는 데에는 한국 대기업들의 중요한 역할이 작용했습니다.
한국의 대우는 ‘올트시트’라는 루마니아 자동차 공장을 인수해 루마니아 소비자들의 생활 양식, 생활 수준과 구매력을 잘 고려하며 생산과 판매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루마니아 상황에 맞는 자동차를 1994년부터 루마니아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고용해 루마니아에서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우자동차 덕분에 루마니아 국내시장에서 경쟁이 심해지자 루마니아의 ‘다치아’ 자동차도 프랑스의 ‘르노’와 합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다치아’ 의 선전도 아주 활발합니다. 2년전부터 ‘다치아 자동차’는 이탈리아 최고 축구 리그 ‘세리에 A’에 속한 축구단 ‘우디네세 칼쵸’(Udinese Calcio)의 광고주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축구 경기장에서 ‘우디네세’ 선수들의 유니폼에 찍혀 있는 ‘다치아 자동차’의 광고를 많이 볼수 있습니다. ‘우디네세’의 다른 광고주는 월드컵때 북한 축구국가대표팀에 협찬을 해준 ‘Umbro’라는 운동복과 운동화 회사입니다.
북한도 1989년까지 상황이 많이 비슷하던 루마니아의 교훈을 살펴 봐야 합니다. 공산주의 중앙계획경제 때문에 위기에 빠진 북한의 경제와 산업을 소생시키기 위해 자유시장과 경제 개방을 거부하지 않으며 한국을 포함한 외국 기업들과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휫바람 자동차’는 ‘평화 모터스’의 직접 투자를 받고 있지만, 사실 생산력이 약해1년에 몇백대밖에 생산하지 못합니다. 북한도 경제 개혁을 이끌어나가면서 노동권을 포함한 인권을 지키게 되면 한국과 외국인 투자와 현대기술을 받아 휫바람 자동차를 바탕으로 루마니아의 ‘다치아’처럼 해외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다치아’ 최초 SUV 즉 스포츠유틸리티 차량 ‘다치아 더스터’는 인기가 너무 좋습니다. SUV는 가벼운 트럭형의 몸체로 만들어져 4륜구동이 가능한 비포장도로에서도 주행할 수 있는 튼튼한 자동차입니다. 경주용 ‘다치아 더스터’는 모로코 사막에서 벌어진 ‘Rallye Aicha des Gazelles’ 경주에서 8팀중 1위, 2위와 5위를 차지했습니다. 빙판 위에서 벌어진 ‘Trophee Andros’ 경주에서 유명한 프랑스 출신 포뮬라 원 (Formula 1) 운전자 Alain Prost가 ‘다치아 더스터’를 운전하며 우수한 결과를 거뒀습니다. 1만2천유로부터 1만5천유로 사이의 가격으로 아주 저렴하여 ‘가난한 자의 SUV’라 별명이 붙은 ‘다치아 더스터’는 루마니아에서 1년에 약 15만 대나 생산되며 50%정도가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연합 나라에서 팔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러시아나 남미의 콜롬비아와 같은 해외시장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다치아 더스터’는 루마니아 국내시장에서도 현재 가장 잘 팔리는 한국산 ‘현대 투싼’ (Hyundai Tucson)을 추월할 예정입니다.
루마니아 ‘다치아’ 자동차의 역사는 개혁과 개방으로 부활한 루마니아 경제의 상징이라 볼 수있습니다. ‘다치아’는 기원 후 2세기에 로마제국으로 흡수되기 전 루마니아의 옛날 이름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시대 루마니아의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체스쿠 대통령은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북한식 독재 체제와 독재자 개인 숭배에 반한 나머지 루마니아식 ‘주체’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독재 정부는 연필부터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국내에서만 생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부는 자동차 기능과 모양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연구를 위한 투자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자동차인 '다치아'를 1960년대부터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진 1989년까지 차의 모양이나 기능을 거의 바꾸지 않은 채 30년 가까이 똑같은 구형차를 생산했습니다.
차우체스쿠 공산독재 시절 해외정보국 대장이던 미하이 파체파 장군은 1978년 서독으로 출장을 갔다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유명한 경제.사업 문제를 토론하는 미국 일간지 ‘Wall Street Journal’에서 2009년에 출판된 파체파 장군이 쓴 기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시대에 루마니아 자동차 산업을 설립하는 것은 해외정보국, 즉 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술을 훔치려는 간첩들의 대장이던 파체파 장군의 임무였습니다. 파체파 장군은 화학 전문가이며 자동차와 관련된 공부를 해본적은 없었지만, 루마니아가 공산국가가 되기 전에 아버지가 미국 자동차업체인 GM지사장이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때 루마니아 국내 시장에서 팔리던 ‘다치아’는 사이드미러나 라디오와 같은 기본 사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루마니아의 경제가 자유경제가 아니라, 중앙계획경제였고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은 국내 소비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를 사고 싶은 사람들은 주문을 한 후 생산력이 부족한 공장에서 차가 나올 때까지 2, 3년씩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1989년말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진 후 루마니아는 쉽지 않은 전환기를 극복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이 1980년대말과 1990년대초반에 공산권이던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시키려는 북방 정책을 구성해 러시아, 중국과 동유럽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설립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들도 1990년대 초반, 동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변화를 잘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라는 떠오르는 시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이 부활하는 데에는 한국 대기업들의 중요한 역할이 작용했습니다.
한국의 대우는 ‘올트시트’라는 루마니아 자동차 공장을 인수해 루마니아 소비자들의 생활 양식, 생활 수준과 구매력을 잘 고려하며 생산과 판매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루마니아 상황에 맞는 자동차를 1994년부터 루마니아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고용해 루마니아에서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우자동차 덕분에 루마니아 국내시장에서 경쟁이 심해지자 루마니아의 ‘다치아’ 자동차도 프랑스의 ‘르노’와 합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다치아’ 의 선전도 아주 활발합니다. 2년전부터 ‘다치아 자동차’는 이탈리아 최고 축구 리그 ‘세리에 A’에 속한 축구단 ‘우디네세 칼쵸’(Udinese Calcio)의 광고주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축구 경기장에서 ‘우디네세’ 선수들의 유니폼에 찍혀 있는 ‘다치아 자동차’의 광고를 많이 볼수 있습니다. ‘우디네세’의 다른 광고주는 월드컵때 북한 축구국가대표팀에 협찬을 해준 ‘Umbro’라는 운동복과 운동화 회사입니다.
북한도 1989년까지 상황이 많이 비슷하던 루마니아의 교훈을 살펴 봐야 합니다. 공산주의 중앙계획경제 때문에 위기에 빠진 북한의 경제와 산업을 소생시키기 위해 자유시장과 경제 개방을 거부하지 않으며 한국을 포함한 외국 기업들과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휫바람 자동차’는 ‘평화 모터스’의 직접 투자를 받고 있지만, 사실 생산력이 약해1년에 몇백대밖에 생산하지 못합니다. 북한도 경제 개혁을 이끌어나가면서 노동권을 포함한 인권을 지키게 되면 한국과 외국인 투자와 현대기술을 받아 휫바람 자동차를 바탕으로 루마니아의 ‘다치아’처럼 해외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