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북 정치범관리소에 수감됐던 알리 라메다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2024.02.13
[스칼라튜] 북 정치범관리소에 수감됐던 알리 라메다 1960년대에 북한에 머물던 베네수엘라 시인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북한의 실상을 언급하는 바람에 7년간 노동교화소에 수감된 사연이 지난 2016년 뒤늦게 알려졌다. 베네수엘라 일간지인 '라 보스'는 지난 2016년 시인이자 언론인인 알리 라메다가 북한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라 보스 홈페이지 캡처]
/연합뉴스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위성사진 분석과 북한을 탈출한 수감자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불법구금시설을 조사하는 사람으로서 많이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북한 정치범관리소, 교화소와 다른 구금시설에는 북한 사람들만 수감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외국인들까지 수감되어 있었나요?’

 

사실 김씨 일가 정권 하에 지난 76년 동안 수백만 북한 주민들이 구금시설에 구금되어 수심만명이 고문, 아사, 비밀처형, 공개처형과 강제 노동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열악한 구금시설과 심각한 인권유린과 비인간적 범죄를 온 세상 앞에서 처음 폭로한 사람은 북한 주민이 아닌 외국인이었습니다. 그 증인은 남미 베네수엘라 출신 알리 라메다 (Ali Lameda)라는 시인 겸 언어학자였습니다.


45년 전 1979년 2월 24일, 국제 인권 보호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심수의 경험에 대한 개인적 진술'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국제앰네스티는 전 세계에 광범위한 베네수엘라 시인 알리 라메다 (Ali Lameda)의 북한 관리소에 수감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했습니다. 라메다와 함께 프랑스 출신 자크 세디요 (Jacques Sedillot)도 북한 정치범 관리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알리 라메다는 1974년 3월 국제 앰네스티 국제 양심수로 채택되었습니다. 국제 앰네스티는 그의 석방을 위한 캠페인을 세계적으로 벌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북한 당국에 의한 체포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라메다는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없이 1년 동안 구금됐습니다. 그리고 가택 연금 기간 이후 두 번째로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라메다는 재판을 받았으며 20년 교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라메다는 6년을 복역했습니다. 그의 수감 조건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그는 남은 형기를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어 행운이었다고 했습니다.


알리 라메다는 1924년 6월 12일 베네수엘라 내륙 라자 주 카로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라메다는 학사 학위를 마친 후 콜롬비아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몇 년 후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베네수엘라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체스꼬슬로벤스꼬 (체코슬로바키아)로 가서 5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시 중 하나인 ‘에보카시온 아 로씨야,’ 즉 ‘로씨야로의 회상’을 썼습니다. 그는 체스꼬 말을 (체코어를) 배웠고 체스꼬슬로벤스꼬 작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시인 림보, 발레리, 보들레르 등을 에스빠냐어 (스페인어로) 번역했습니다.


라메다는 동독 동베를린에 살면서 동베를린의 외교 및 문화계에서 작가이자 남미 공산당의 저명한 당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당시 북한은 김일성 외교 정책을 세계적으로 선전하는데 협력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빠냐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 능통한 번역가와 편집자이던 라메다는 북한 당국의 초대를 받아 1966년 중반 평양에 정착했습니다. 라메다는 그 이후 북한 외무성의 직접 통제하에 김일성이 쓴 글과 다른 북한 자료를 에스빠냐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업무는 에스빠냐어권 세계를 위한 정보와 선전의 모든 측면을 포함했습니다. 라메다는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967년 9월 23일 알리 라메다를 위한 만찬까지 북한 외무성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알리 라메다는 김일성 정권에 관한 말을 잘못했다고 의심받아 북한 당국에게 조사와 심문을 받고 구속되어 심각한 고문, 굶주림과 강제노동을 겪었습니다. 1970년대 초, 라메다의 사건은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조사되었고 국제앰네스티는 그를 양심수로 채택했습니다. 그의 사건은 국제 앰네스티의 주목을 받으며 그의 석방을 앞당겼습니다. 이 기간 동안 베네수엘라 정부도 외교 채널을 통해 라메다의 석방을 위한 노력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또한 라메다에 따르면 김일성과 긴밀한 우정을 맺었던 로므니아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그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 그를 석방시키도록 김일성을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알리 라메다는 결국1974년 5월에 석방되어 북한을 떠났습니다. 라메다는 동구라파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그의 건강 상태가 충분히 호전되어 베네수엘라로 돌아가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메다와 함께 북한에 수감되었던 프랑스 번역가 자크 세디요 (Jacques Sedillot)는 석방된 후 수감되어 있는 동안 겪은 굶주림과 고문 때문에 평양에서 사망했습니다.


알리 라메다는1974년 수용소와 북한을 떠날 때 한 기자에게 ‘그들은 (북한 정권은) 내 기억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죽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라메다는 이 말을 통해 400여 편의 시와 300여 편의 소네트 7년간의 수감 기간 동안 연필이나 종이 없이 머리 속에 창조했다는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라메다는 그 시와 소네트를 펴 낼 때 남미 잡지는 ‘공포와 비참함의 세계에서 거대한 창조적 노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2024년 2월 현재 아직까지 20여만명이 북한 정치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심만명이 북한의 교화소, 구류장, 집결소, 노동단련대와 다른 구금시설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45년 전 발간한 알리 라메다 관련 국제 앰네스티 보고서를 상기하면서 국제사회는 김정은 정권을 압박하여 북한 당국에 의한 반인륜 범죄를 중단시키고 북한의 정치범들을 시급히 석방시켜 북한의 정치범관리소와 다른 불법구금시설을 해체해야 합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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