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붉은 황제’가 사망한지 70년 후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2023.03.07
[스칼라튜] ‘붉은 황제’가 사망한지 70년 후 2019년 3월 5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 66주기 추모식에서 한 참석자가 꽃을 들고 있다.
/REUTERS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올해 7월27일은 한국 전쟁 휴전 협정 70주년 기념일입니다. 한반도 분단과 수백만명이 희생을 당한 한국 전쟁의 책임자는 바로 한국을 침략한 북한 독재자 김일성과 구소련 독재자 스탈린입니다. 스탈린은 북한을 점령하여 자유선거를 금지시키며 한반도를 분단시켰습니다. 또한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임명하면서 지난 80년 가까이 북한 인민들을 착취하고 탄압해 온 김씨 일가 독재 체제를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70년 전 1953년3월 5일 ‘붉은 황제’라 불리던 이오시프 스탈린 (스딸린) 구소련 독재자가 사망했습니다. 스탈린 정권의 특징은 독재자 개인숭배, 사악한 인권유린, 정치탄압, 강제노동수용소, 숙청, 살인, 소수민족 대학살, 전범, 기아와 독립국 침략을 통한 ‘붉은 위성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1878년에 태어난 스탈린이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레닌의 ‘신 경제 정책’을 중앙계획경제와 사악한 개인독재로 바꿔 놓았습니다. 스탈린이 소련을 강제로 산업화시키면서 소련의 농업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대규모 기아로 소련 주민 600만-80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 중 400만 -500만 명이 당시 구 소련에 속하던 우크라이나 주민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 기아 시기를 아직까지 ‘홀로도모르’ 대학살로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군인과 민간인들은 지난 1년 넘게 로씨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뿌찐 (푸틴) 지시에 의한 로씨야군 침략에 용감하게 저항해 왔습니다.


1937년과 1938년 구 소련에서 ‘대숙청’이라 불리던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탈린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농민과 소수민족을 탄압했으며, 주변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까지 간첩 혐의로 수용소에 수감해 학살했습니다. 사상자 수는 공식적으로 68만1천692 명이지만, 실제로는 2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기밀시효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에 따르면, 1937년과1938년에 소련의 비밀경찰(NKVD)이 154만8천367 명을 구속했고, 이 중 68만1천692명이 총살되었습니다. 


1939년9월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 독일과 스탈린이 주도한 소련이 뽈스까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뽈스까에서 독일과 소련은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습니다.  1940년 4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악명 높은 구 소련 비밀경찰(NKVD)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산림 지역인 ‘카틴 숲’에서 전쟁 포로로 붙잡힌 뽈스까 장교 2만 2천여명을 살해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의해 야만스럽고 잔인한 대학살을 겪은 유럽의 유태인 다음으로 고통을 가장 많이 겪었던 사람들은 바로 소련 국민이었습니다. 나치 독일 침략에 의해 소련 군인과 민간인 모두 합쳐 2천300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많은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 공산주의 독재 때 수용소로 이송되어 침엽수림에서 사망했습니다.
제2차 대전 직후 소련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로므니아 (루마니아), 마쟈르 (헝가리), 체스꼬슬로벤스꼬 (체코슬로바키아), 벌가리아 (불가리아)와 뽈스까 (폴란드)를 짓밟은 뒤 동독처럼 공산주의 국가로 변화시켰습니다. 이들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전통적 가치관과 문화와 역사를 잔인하게 짓밟아 없앴습니다. 그들은 동유럽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교도소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 소위 엘리트 계층, 즉 지식인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정권 하에 예전 스탈린 정권의 상징이던 강제수용소와 극심한 정치탄압과 인권유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물론 흐루시초프도 개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흐루시초프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공자들을 공산주의 체제에서 해방하려고 했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정치범 관리소 제도는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북한의 사회안전성은 김일성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노동당 고위관리들과 다른 주민들을 숙청했습니다. 김일성 1인독재와 ‘주체 사상’을 북한체제의 기본으로 설정하기 직전 10만 명 가까이 정치범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관리였던 탈북 인사에 의하면 이들 중 1960년대7만여명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6천여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구 소련이 와해되어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체제가 무너진 지 34년이 흘렀지만, 스탈린의 사악한 유산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3대 권력세습을 바탕으로 해 온 김씨 일가의 독재가 면면히 이어지는 북한, 20만 여명이 수감되어 있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입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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