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루마니아 체조 감독 벨라 카롤리 사망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2024.11.26
[스칼라튜] 루마니아 체조 감독 벨라 카롤리 사망 지난 15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사망한 벨라 카롤리 전 로므니아 (루마니아) 여자 체조 감독.
/AP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유명한 로므니아 (루마니아) 여자 체조 감독 벨라 카롤리 (Bela Karolyi)는 지난 11월 15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사망했습니다. 벨라 카롤리와 아내 마르타 (Marta)는 로므니아와 미국 여자 체조를 세계 챔피언 수준으로 개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카롤리 부부는 로므니아 나디아 코머네치 (Nadia Comǎneci)와 미국의 메리 루 레턴 (Mary Lou Retton)을 포함하여  로므니아와 미국에서 여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세계 챔피언을 훈련했습니다.


벨라 카롤리와  그의 아내는 로므니아 수도인 부꾸레쉬띠 (부쿠레슈티)의 체육 및 스포츠 연구소에서 대학 1학년 때 만나 평생을 함께했습니다. 10대 시절 벨라 카롤리는 육상 선수이자 권투 국가대표 챔피언이었으며, 1963년 그의 아내가 된 마르타는 체조 선수였습니다.

 

연구소를 졸업한 후 두 사람은 그 당시 공산권 독재 국가이던 로므니아 도시 (Hunedoara)후네도아라의 이웃 마을인 불칸 (Vulcan)과 루페니 (Lupeni)에서 교사로 발령받았습니다. 카롤리 감독이 1994년에 펴 낸 자서전 ‘두려움 없다: 체조 인생의 힘, 열정, 정치’에서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그곳은  로므니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장비를 살 돈도 없었고 급여도 적었어요. 저는 마르타에게 두 광산 마을을 고려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저는 아주 가까워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데려가자, 벨라’라고 그녀가 대답했다고 카롤리 감독이 자서전에서 회상했습니다.

 

두 감독은 불칸에서 최초로 체조팀을 창단하여 1964년 어린이 전국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광산 마을에는 체육관이 없었고 아이들의 부모는 체조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훈련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성과는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칼롤리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 마을에는 조직적인 체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훈련 첫날 우리는 아이들이 옷을 망치지 않도록 바지와 셔츠를 벗게 했어요. 아이들은 양말, 바지, 속옷, 셔츠, 신발 등 한 켤레씩만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줄 체육복이 없었지만 수업을 위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했고, 바지가 찢어져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속옷 차림으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라고 칼롤리 감독은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이렇게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롤리 부부는 세계적인 전설을 만들어 냈습니다. 1976년 14살이던 카롤리 부부의 제자이던 나디아 코머네치는 카나다 (캐나다)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에 출전해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아 ‘체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코머네치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체조 역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평균대, 개인 종합, 이단 평행봉에서 금메달 셋과 단체 종합에서 은메달 하나, 그리고 마루운동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지난 48년 동안 ‘체조의 여왕'이라 불리던 코머네치로 인해 여자 체조는 전 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코머네치는 20세기 최고의 운동 선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물론 냉전 시대 때 공산주의 언론은 코머네치의 이미지를 이용해 독재자이던 차우셰스쿠 정권을 해외에 선전하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공산당 행사를 할 때마다 코마네치는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독재자와 그의 아내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코머네치는 자신의 감독인 벨라 카롤리와 그의 아내인 마르타가1981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국가대표팀감독이 되면서 국가안전보위부 (Departamentul Securitǎții Statului)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코머네치도 이들을 뒤따라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코머네치는 반공산주의 혁명 한달전인 1989년 11월 마쟈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에 와 1976년 올림픽 남자 체조 금메달을 딴 미국 선수 바르트 코너와 1996년 결혼을 했습니다. 코머네치는 남편과 미국 오클라호마 시티 (Oklahoma City)에서 체조 학교를 같이 운영하고 책을 쓰기도 했으며 '세계 체조 선수'라는 잡지를 출판했습니다.

 

카롤리 부부는 1981년 미국으로 망명 후 미국의 여자 체조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벨라 카롤리는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메리 루 레턴을 올림픽 종합 타이틀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메리 루 레턴 이후 미국의 여자 체조는 국제 경기에서 계속 훌륭한 결과를 거둬 왔습니다.

 

벨라 카롤리 감독 덕분에 로므니아와 미국 여자 체조는 번영했지만,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감독이었습니다. 벨라 카롤리는 과시하고 선수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멀리 밀어붙인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래리 나사르’라는 미국 국가대표 체조 팀 의사에 의한 성폭력 스캔들 때문에 카롤리 부부는 당연히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공산주의 독재에서 탈출했지만 미국에서도 독재적인 방법을 훈련에 계속 적용했습니다. 이 부부는 로므니아와 미국 여자 체조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나디아 코머네치를 비롯한 많은 체조 전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들의 공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훈련 방법이 꼭 필요했을까요? 로므니아를 보면 어린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독재가 아닌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민주주의로부터 유래한 인프라와 자금, 지원, 그리고 훌륭한 운동 교육 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벨라 카롤리 감독이 많은 결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공산주의 독재 나라이던 로므니아에서 ‘나디아 코머네치’라는 전설을 만들었던 유산을 기념할 이유는 많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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