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의 결과를 담은 공동보도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여기에 담겨 진 핵문제에 관한 합의 내용에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핵문제에 관한 공동보도문의 대목은 “남과 북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최종목표로 하여 분위기가 마련되는 데 따라 핵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 나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는 대체로 네 개의 메시지가 담겨 져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메시지는 여기서 말한 ‘한반도의 비핵화’가 비록 표현은 ‘비핵화’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나와 있는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이 오래 동안 주장해 온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임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메시지는 공동보도문에서 말하는 ‘핵문제’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문제 삼고 있는 ‘북핵문제’가 아니라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의 핵문제’임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메시지는 여기서 말하는 ‘핵문제’의 “대화의 방법에 의한 평화적 해결”은 북한의 조건을 미국이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분위기 마련”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메시지는 여기에 언급된 소위 ‘실질적 조치’도 북한이 내놓는 ‘전제조건’을 미국이 수용하여 “분위기가 마련되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네 개의 메시지를 통해 북한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한 가지로 집약됩니다. 북한은 우선 6자회담 복귀의 조건으로 무엇보다도 미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보유 선언’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여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6자회담에 복귀하더라도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복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 공인된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6자회담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면 상황은 근원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핵보유국’으로 공인될 경우 북한은 6자회담에 나와서 “지금 세계에는 북한 말고도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와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8개의 핵보유국이 있는 데 유독북한에 대해서만 핵포기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논거로 내세우면서 “북한의 핵포기만 따로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핵보유국들의 핵을 포기하는 문제와 함께 일괄하여 국제 전략무기 감축협상, 즉 군축협상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이 노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북한은 회담 재개 여부와는 상관없이 실제로는 핵을 포기하지 않은 채 무기한 6자회담을 끌고 가면서 그 난항과 교착의 책임을 미국에 전가시켜서 미국의 여론분열을 조장하고, 미국과 동맹국들, 특히 한미관계의 이간을 획책할 뿐 아니라 남한 사회 내에서 ‘민족공조’라는 하나의 허구를 조작하여 특히 청소년들의 ‘반미정서’를 더욱 증폭시키는 데 이를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한이 핵문제를 그들의 전통적 대남전략의 하나인 ‘갓끈 전략’에 접목시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북한의 소위 ‘갓끈 전략’란 남한이 ‘미제’라는 ‘갓’의 힘으로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동맹’이라는 ‘갓끈’을 끊어버림으로써 남한을 붕괴시킨다는 대남전략을 말합니다.
이번 15차 남북장관급회담의 결과는 남한의 노무현 정부가, 알고 하는 것인지 모르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이 같은 북한의 편에 서서 그 들러리가 되고 또 그 대변자가 되어서 북한의 ‘갓끈 전략’에 농락당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남한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2007년 대통령선거 전략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남한 국민의 67%가 지난 6월17일 평양에서 있었던 북측 김정일과 남측 정동영 사이의 면담이 남북관계 개선과는 무관하다고 보거나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불과 32%만이 최근의 남북당국간 접촉이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 마련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김정일의 북한이 남쪽의 노무현 정부를 역으로 이용하여 한반도의 핵위기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장시키려 하고 있고 그 결과로 ‘한미동맹’이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