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자동차 사고

며칠을 앓고 일어난 아들에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단단히 훈시를 주고 출근을 했습니다. 봄이 온 탓인지 점심을 먹고 잠이 소르르 오는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손 전화기에 ‘고객님의 사고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런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습니다.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서울-김춘애 xallsl@rfa.org
2009.03.27
아침에 출근할 때 분명히 누워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나왔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아들에게 전화를 돌렸습니다. 전화를 받은 아들이 금방 집 앞에서 충돌사고가 있었다고 했고 기죽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덧붙였습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얼마 멀지 않은 거리라 정신없이 달려갔더니, 벌써 자동차 보험소에서 나와 있었습니다. 우선 아들부터 다친 곳은 없는지 아래위를 흩어 보고 상대방 운전자를 확인했습니다.

상대방 운전자는 아줌마였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차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병원으로 가려고 차를 운전해 나왔는데, 집 앞 3차선에서 우회전 신호를 받으려고 서 있는데 갑자기 뒤를 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사고가 나서 차가 부서지긴 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아 조금 안심은 됐습니다. 저의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아들은 왜 큰일이 아닌데 왔는가 하며 오히려 놀란 엄마를 걱정해 줬습니다. 저는 아직 북한의 강한 사투리가 투박하게 튀어나오는 말투로 못쓰게 된 차를 이리저리 만져 보며 아쉬운 소리를 했습니다.

다시 회사로 들어 돌아왔지만, 오후 반나절 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망가진 차가 아까워서라기보다 아들이 안타까워서였습니다. 아들 아이는 차를 무척 좋아해서 이곳저곳 손수 고치고 꾸미고, 1평도 안 되는 차 안을 멋있게 꾸며 놓았었는데 그걸 하루아침에 못쓰게 돼버렸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싶었습니다.

퇴근해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들의 얼굴 모습부터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던 차 열쇠가 집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아들은 보험사에서 대리 차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고가 난 차를 수리하는 동안 타고 다닐 차를 보험사에서 내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나 싶었습니다.

3일이 지나자 아들은 차를 찾아왔다면서 좋아했습니다. 저는 우선 차 수리비가 걱정돼서 ‘얼마나 들었는가?’고 물었더니 아들은 사고의 과실이 상대방 운전자에게 있기 때문에 한 푼도 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한 듯 말했지만, 저는 내심 놀랐습니다. 자동차 한 번 고치려면 몇 달은 걸리고 또 자동차 사고 한 번 내면 징계까지 당하던 저의 과거 경험과 너무 다른 얘기기 때문입니다.

지난 군 생활에 있었던 일입니다. 서해 바닷가로 포 실탄 사격을 갔었습니다. 기차역에서 멀고 먼 바닷가에 있는 실탄 사격장으로 가던 도중, 길가에서 포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포차에는 2톤 600의 무게가 되는 14.5 미리 사신 고사 총이 견인돼 있었습니다. 포차의 가스겟트가 나갔다고 했습니다. 북한군에서는 포차나 화물차에 가스겟트가 자주 나가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차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얇은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는 판에 8자 모양으로 여러 구멍이 나있는 작은 부속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부속품 때문에 우리는 길에서 3박 4일을 보냈습니다. 나이 어린 처녀 운전사는 걸어서 은률 광산 지배인, 당시 혁명화로 내려가 있는 최광을 찾아가 해결해 가지고 왔었습니다. 낮에는 삼복더위의 따가운 햇볕에 고달팠고 야밤에는 요란한 우렛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내리는 소낙비 때문에 겁에 질려 총을 억세게 잡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차 사고나 고장으로 수리소에 들어가면 부속이 없어 아무리 빨라도 3개월 늦으면 1년도 걸렸습니다. 군에서 고사총의 작은 부속 고장으로 수리소에 들어가도 거의 1년이 걸려야 수리가 완성됐습니다.

또 제가 수산물 상점에서 근무할 때는 차 고장으로 평북에서 평양까지 일주일이 걸린 적도 있습니다. 김장철이라 젓갈류를 인수하려 지방으로 출장 갔는데 젓갈을 싣고 평북도 염전에서 평양까지 들어오는 길에서 자동차 타이어가 터졌습니다. 땜을 때야 하는데 그 작은 구멍 하나를 때울 수 있는 곳이 없어 이 마을 저 마을 길거리에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일주일, 말은 쉽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답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텐데요, 가는 날이 장날이고 밥 없으면 더 배고픈 법. 북쪽의 차는 고장도 잦습니다.

남쪽은 자동차를 참 잘 만듭니다. 몇 년을 가도 거의 잔 고장이 없고 수출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리한 기술을 남북이 함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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