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의 위성국에서 해방돼 자유민주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발트 3국에 대한 최근의 변화상을 현지를 직접 답사한 서울의 이호림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4년 만에 가본 발트 3국의 첫 인상은 국경에서부터 달랐습니다. 폴란드 국경에서 리투아니아 국경으로 넘어갈 때는, 보통의 유럽 국가에서처럼 여권 검사가 기차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폴란드 국경수비대원이 온 뒤 바로 리투아니아 국경 수비대원이 여권을 검사했습니다.
구소련 시절만 해도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3국은 소련의 일부인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국경에서 엄격한 검사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같은 자유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트 3국이 구소련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 EU, 즉 유럽 연합에 가입한 이후에는 상황이 크게 바뀌어서, 현재와 같이 자유스럽게 국경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리투아니아에서 라트비아를 갈 때 약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선 제가 리투아니아에서 탔던 기차는 라트비아를 지나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라서 그런지,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국경에서 모두,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국경 수비대원이 여권을 검사하였습니다. 비록 발트 3국이 EU에 가입하긴 하였지만, 아직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저의 여권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남한이 국적인 저의 여권 겉면에는 영어로 Republic of Korea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라트비아 국경 수비대원이 제가 어느 나라에서 온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Republic of Korea라는 국가가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을 구별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비자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남한 북한 국민은 라트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모두 라트비아 비자를 소지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라트비아가 EU에 가입한 지금, 남한 국민은 비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Republic of Korea가 어느 나라인지 정확히 모르는 라트비아 국경 수비대원은, 저에게 러시아어로 남한 북한 중 어느 나라 국민인지를 오히려 물어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전에 남한이 소련과 수교하고 나서 초창기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택시를 타고 남한 대사관을 가자고 하면, 남북한 대사관을 구별하지 못한 소련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을 북한 대사관에 데려다 주곤 했었습니다.
폴란드 국경을 통과해 도착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는, EU 가입 후 많이 발전한 모습이었습니다. 기차역의 시설이 구소련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되어 웬만한 유럽 국가들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이것은 리투아니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일부분 이었습니다. 첫째,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구소련의 잔재를 없애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차역뿐만 아니라 모든 공공시설, 은행, 도로 표지판이나 거리 간판, 그리고 버스 안내방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오직 리투아니아어로만 쓰여져 있고, 리투아니아어로만 방송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는 국제선 창구에 러시아어가 다른 언어와 함께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3국에서는 공공기관에 취업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발트3국어로 된 언어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거리 곳곳에서 들리는 말은 리투아니아어보다도 러시아어가, 아직까지는 더 많이 들리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유럽화되고 있지만 언어습관이나 의식 속에는 아직 구소련이나 현재 러시아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면이었습니다.
둘째로, EU 가입 후에 생긴 커다란 변화는 운송 수단에서 일어났습니다. 구소련 시절이나, 현재의 러시아와는 달리 개인 승용차는 모두 유럽이나 기타 국가에서 들여온 최신식 자동차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러시아에는 소련시절부터 있던 구형 승용차와 유럽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자동차가 혼재하는 반면, 리투아니아에서는 달랐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운전석과 조수석 옆에 거울을 하나만 달고 다니는 차들이 많은 반면, 리투아니아에서는 모든 승용차들이 유럽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구소련 시절에도 발트 3국 국가들이 다른 구소련 연방 공화국들보다 잘 살았지만, EU 가입후에는 발트3국의 경제적 수준이 훨씬 더 나아졌다는 점을 잘 증명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공공 교통, 즉 버스나 전차는 구소련 시절의 것을 사용하고 있어서,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구소련 시절이나 현재 러시아에서처럼 정해진 노선을 달리면서 손님을 승하차시키는 노선 택시가 있다는 점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여전히 구별되는 점이었습니다.
셋째로,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건설 경기가 매우 활발하다는 것입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는 유럽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구시가지를 포함하여 시내 전역에서, 광범위한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즉 19세기나 구소련 시대부터 있던 오래된 건물을 보수하거나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새로 포장하는 등의 공사가 널리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내 중심지는 보수 공사가 많이 진행되어 비교적 깔끔한 모습이지만, 주택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저는 구시가지에서 약 1km떨어진 주택가 지역 숙소에 머물렀는데, 그곳에는 유럽식으로 멋지게 새로 들어선 건물이 있는가하면, 폐허가 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 흉물스런 건물이 그대로 방치된 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건물들은 구소련 붕괴이후 재정의 빈곤으로 인해 그대로 버려두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비록 리투아니아가 EU에 가입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서유럽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는 남한의 기업들을 포함해서 3000여개의 외국계 회사가 활동할 정도로 빠르게 경제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EU 가입 후 급격하게 오르고 있는 물가, 우수한 인력의 서유럽 이주로 인한 인구 감소, 그리고 아직도 이따금씩 등장하는 구소련의 잔재 청산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이 공산주의의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 진정한 EU 국가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