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권운동25주년] ① COI까지 달려온 북인권운동, 향후 과제는?
2021.05.04
앵커: 지난 1996년 5월 한국 최초의 북한인권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창립됐습니다. 그 이후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삶을 개선시키려는 다양한 활동이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는데요. 이 같은 활동이 올해로 2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에 자유아시아방송과 북한인권기록관건립추진위원회는 그동안의 북한인권활동을 재조명하고 향후 활동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순서로 북한인권 문제의 국내외 여론 형성과 북한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재조명해봅니다.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2003년 4월 유엔인권이사회(당시 유엔인권위원회)가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 이후 처음으로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임명을 명시한 결의안이 통과돼 비팃 문타폰(Vitit Muntarbhorn) 초대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3년에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설치를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돼 유엔이 북한 인권 문제를 포괄적으로 조사하는 활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결의안에 북한 지도부의 책임을 묻는 문구가 포함되고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유엔 사무소가 서울에 설치되는 등 북한인권운동 25년 동안 많은 성과가 이뤄졌습니다. 이 같은 성과가 나오기까지 한국 내 시민단체들의 헌신과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의 국제 여론화에 앞장선 한국 내 북한인권단체들
지난 1996년 5월 활동을 시작한 한국 내 최초의 북한인권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시민연합)의 창립자 중 한 명인 김영자 사무국장은 여전히 북한인권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 (2004년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임명 당시) 우리가 처음 설정한 목표를 빠른 시일 내에 달성한 것으로 봤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곧 자유를 누릴 것으로 생각했었죠. 그런데 25년이 지나도 북한은 여전히 암흑이고 자유가 없고 우리가 하는 일은 험난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국제무대에서 전개한 애드보커시 활동, 즉 북한인권옹호 활동은 북한인권 문제와 관련한 국제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고(故) 윤현 전 이사장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시민연합이 국제 여론 형성에 앞장서 왔습니다. 한국 내 최초의 북한인권단체로서 다른 활동가들과 단체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민연합은 창립 직후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알렸고 해외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를 병행하며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유엔 무대에서 애드보커시 활동을 벌였습니다.
시민연합이 1996년부터 발행한 계간지 ‘생명과 인권’은 한국어, 영어, 일어 3개 국어로 국제사회에 배포됐고 이는 1998년 수잔 숄티 디펜스포럼재단 대표를 통해 미국의 주요 인사, 기관들에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등 탈북민들의 정치범수용소 관련 증언이 더해지면서 미국사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시민연합은 1999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 일본, 유럽, 호주, 캐나다 등지에서 모두 13차례에 걸쳐 북한인권과 탈북난민을 주제로 국제회의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부터 재중·재러 탈북민 실태보고서를 시작으로 약 26건의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북한 인권과 관련한 영문 보고서가 부족하던 시기 국제사회에 북한인권의 실상을 알렸습니다.
시민연합과 국제활동을 함께 한 바 있는 원재천 한동대 교수는 북한인권 문제가 2003년부터 유엔의 공식 의제로 설정된 것은 시민연합 등 한국 시민단체들의 활동 덕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원재천 한동대 교수: 문서를 주고 받는 인권 외교가 아니라 직접 부딪히는 인권 외교를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한국과 해외 인권 운동가들의 마음이 합쳐졌습니다. 그게 2003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인권결의안이 통과되기 시작했고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임명되기 시작한 거죠. 즉 최소한 유엔 안에서 만큼은 북한 인권이 (정식) 의제가 된 겁니다.
이 같은 노력은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COI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COI 설립을 위해 시민연합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고위급 인사 등을 대상으로 애드보커시 활동을 벌였습니다. 지난 2012년 3월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별도 행사를 열어 탈북민 강제북송의 심각성을 알리며 COI 설립을 촉구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 민간단체로는 처음으로 탈북민 김혜숙 씨 등과 함께 나비 필레이 당시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만났습니다.
북한반인도철폐국제연대(ICNK)도 당시 유엔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COI 설립의 당위성을 설득해 나갔습니다. ICNK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북한정의연대, NK워치, 노체인 등 한국 내 북한인권단체와 국제인권연맹(FIDH), 휴먼라이츠워치(HRW), 북한인권위원회(HRNK) 등 해외 단체들의 연합체로 권은경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2011년경부터 COI 설립을 위한 활동에 착수했습니다.
권 국장은 “북한인권운동이 폭로의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는 판단 아래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던 시점에서 COI 설립이라는 목표를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권은경 ICNK 사무국장: 마침 당시 운이 좋았던 게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의 2013년 일정이 나왔었습니다. 당시 이사회 회원국들 가운데 중국, 러시아, 쿠바가 빠지는 해가 2013년이었죠. 2013년을 목표로 활동하자는 ICNK의 전략이 2012년에 나왔습니다.
당시 ICNK는 오길남 박사의 사례를 유럽 등 국제사회에 소개하며 COI 설립 필요성을 알리는 데 박차를 가했습니다. 오길남 박사도 유럽을 방문해 자신이 겪은 인권 유린 사례를 증언했습니다.
오 박사는 독일 유학 중 북한 측에 포섭돼 1980년대에 가족과 함께 입북했다가 가족을 남겨두고 탈북한 인사입니다. 그의 탈북으로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고 이후 북한 당국은 유엔을 통해 오 박사의 아내가 사망했다고 통보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오 박사의 사례가 ‘통영의 딸 구출 운동’이라는 활동으로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권 국장은 “북한 인권과 관련된 특정인의 사례를 알리는 것이 국내외적으로 북한 인권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는 데 효율적일 것으로 판단했다”며 “한국 외교부조차도 당시 COI에 대해 알지 못해 이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한국 내 단체들의 활동은 COI 설립과 COI 보고서 발간, 북한 지도부의 책임이 명시된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에 영향을 미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만 COI 설립을 위한 애드보커시 활동에 앞장 섰던 요안나 호사냑 시민연합 부국장은 COI 설립 이후 가해자들을 아직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며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호사냑 부국장은 “북한의 자금을 추적하는 것보다 좋은 방안은 없다”며 “북한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기 위해 각 국가의 정부, 국제기구들 간의 긴밀한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인권 개선 위한 북한 내 활동가 양성 노력
이런 가운데 지난 1999년 한국 내에서 이른바 ‘주체사상파의 대부’로 불렸던 김영환 씨와 학생운동권 출신의 활동가들이 북한민주화 단체,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창립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북한 내 활동가 육성을 통한 북한의 민주화였습니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선 북한의 현재 체제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며 “북한체제를 민주화시키는 것이 활동의 근본 목표였다”고 밝혔습니다.
친척집 방문 명목 등으로 중국으로 나온 북한 주민들을 교육해 다시 들여보내는 역할을 한 강신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이사(통일아카데미 대표)는 북한 내부 활동가로 활약할 주민을 선별하고 육성하기 위해 2002년부터 10여 년 간 중국에 머물렀습니다.
강 이사는 활동가 1명을 육성하는 데 5년 여의 긴 시간을 투자하는 등 신중을 기했습니다. 북한 내 활동가들과의 접촉 및 교류를 위해 북중 접경지역에서 밀선까지 운영했다고 합니다.
강신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이사: 북한 주민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중국으로 나오는 데에는 (빈도 측면에서)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활동가가)북한으로 들어갔다가 긴 시간동안 북한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곤란하니까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밀선을 하나 운영했었습니다.
이어 강 이사는 “2012년 중국 공안에 체포된 이후 모든 연락책과 조직망이 허물어졌다”며 “앞으로 중국에서의 활동은 못한다는 패배감이 생겼고 그동안 함께한 조력자, 북한 내 활동가들에 대한 죄의식도 생겼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김영환 연구위원, 강신삼 이사를 비롯한 중국 내 활동가들이 지난 2012년 중국 공안에 체포된 사건 이후 북한 내 활동가 양성 활동은 사실상 멈춰선 상황입니다. 다만 김 연구위원은 이 과정을 통해 일부 북한 주민들의 인식이 변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노출되지 않게 비밀리에 활동했기 때문에 우리의 활동이 얼만큼 북한 사회에 영향을 줬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진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육성된 사람들이 향후 북한 사회가 커다란 변화에 직면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25년 간의 활동으로 북한인권 개선됐나?
북한인권 상황이 아직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내 전문가들은 지난 25년동안 북한 인권 운동이 기록 보존, 정보 유입, 유엔 청원 활동 등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분야로 분화돼 발전해 왔다는 점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시민연합과 함께 국제 애드보커시 활동에 나선 바 있는 허만호 경북대 교수는 “과거 북한인권운동은 포괄적이었고 한 덩어리에서 진행된 경향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분야로 활동이 세분화됐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허 교수는 25년동안의 북한인권운동으로 북한 인권 상황이 개선됐다고 평가합니다. 적어도 북한이 나름 법치의 틀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허만호 경북대 교수: 북한 당국이 헌법 개정을 통해 거주 이동의 자유를 넣었습니다. 2003년에는 장애인보호법도 제정했고요. 물론 그 수준이 한국의 1970년대라는 비판이 나옵니다만 중요한 것은 법에 근거한 권리주장이니까요. 중요한 변화라고 평가합니다.
1세대 북한인권운동가인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명예이사장도 “인권유린의 죄목으로 북한 보위부원이 처벌을 받은 사례를 확인한 바 있다”며 “‘새로운 인권 지시’가 내려오면서 완화된 처벌을 받은 탈북민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북한 내 인권 상황은 열악하지만 개선되는 사례가 포착되고 있다는 겁니다.
향후 북한인권운동의 과제에 대해선 탈북민들을 좀 더 활동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는 제안이 나옵니다. 이원웅 가톨릭관동대 교수는 “당사자인 탈북민들이 북한과 국제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가 더 선명하고 강력하다”며 “한국 활동가들의 경우 조력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허만호 교수는 북한인권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을 계속 기대해선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의 북한인권재단이 언제 출범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활동가들의 인권운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한국 내 기부문화 정착이 가장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북한인권 문제를 정치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지적도 상당수입니다. 한국의 북한인권재단이 여전히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도 북한인권이 한국 내에서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손광주 전 남북하나재단이사장: (북한) 인권이 본질에서 벗어나 정치화됐습니다. 여야 정쟁의 문제로 됐죠. 세계인권선언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하는데 말이죠. 시민연합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기독교 단체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공론화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입법부와 정부 등에서 북한인권 문제의 본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도 “북한인권운동가들은 정치적 색을 띠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할 필요가 있다”며 “인권운동을 발전시키려면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북한과의 접촉면을 최대한 늘리자는 제언도 나옵니다. 강신삼 이사는 “북한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 대화를 시작하되 이를 계기로 인권 대화를 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북한의 해외 노동자 규제를 풀어주면서 노동자들의 월급 지급 방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