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재일교포가 본 국군포로…”한국행 시도로 공개처형 당해”
2023.11.21
앵커: 지난 1990년경 국군포로 일가족이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는 북송 재일교포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이정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1946년 일본에서 출생해 지난 1960년 7월 가족과 함께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갔다가 지난 2006년 탈북한 북송 재일교포 이상봉(가명) 씨.
이 씨는 한국의 북한인권단체인 물망초가 21일 주최한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 세미나에서 지난 1966년부터 함경북도 회령시 소재 유선탄광에 배치돼 일하다가 만난 국군포로들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상봉 씨: 나는 북한에서 수십 번씩 총살도 보고 교수형도 봤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국군포로 가족인 다섯 명의 이승식 가족입니다. 그래서 온 한국 땅에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한결같은 목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상봉 씨는 그러면서 국군포로 이승식 씨 일가족 5명이 한국행을 시도하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된 후 ‘나라와 민족을 배반했다’는 죄목으로 지난 1990년경 유선 노동자구 보을천 개울가에서 공개 처형 당하는 모습을 참관한 일에 대해 회상했습니다.
이상봉 씨: 재판관의 마지막 선고는 5명은 현장에서 총살한다. 참… 세상에 그 사람들이 뭘 잘못한 게 있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그건 아무 죄도 아니에요. 그것을 민족 반역자라는 죄명을 씌워서 총살을 하는데… 그 아까운 인재들이 내 코 앞에서 그렇게 (죽었습니다)
이 씨는 유선탄광에서 함께 일하며 가깝게 지낸 이승식 씨에 대해 채탄공으로 일하면서 탄광 내 ‘야간 기능공학교’를 2년 동안 다녀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국가기능공 자격 1급을 취득한 후 기계설계원으로 일하며 철판 절단기를 제작하는 등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외에도 국군포로들과의 대화를 상기하며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지 말 것, 3명 이상 모이지 말 것, 국군포로 대신 '남조선 괴뢰군' 호칭을 쓸 것 등을 강요했다고 이상봉 씨는 전했습니다.
이상봉 씨: ‘우리는 재일교포와 또 다르다. 네 가지 철칙이 있다. 이산가족을 절대 만나겠다고 하지 말라. 이산가족 신청도 하지 말라. 국군포로 3명 이상 모이지 말라. 국군포로라 하지 말고 ‘남조선 괴뢰군’이라 해라. 대한민국이라 하지 말고 ‘남조선 괴뢰’라 해라.’ (라고 했습니다)
또 유선탄광에 배치된 국군포로는 1950년대에는 약 600명이었다고 들었으며 본인이 일을 시작한 1966년에는 낙반 사고, 가스폭발 사고, 폐병 등으로 사망해 이 중 90명 정도가 남아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울러 함께 일했던 국군포로들은 1931∼1933년생이 많았고 살아있다면 90살이 넘었다며 하루빨리 북한 내 국군포로들을 구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지난 2013년 국군포로 취재를 시작해 지난 5월 귀환 국군포로 증언집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를 발간한 이혜민 작가는 이날 행사에서 이승식 일가족의 사례는 한국행을 시도하다 강제로 북송된 다른 국군포로들의 사례와 더불어 북한 내 국군포로들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진단했습니다.
이혜민 작가: 이승식 일가족이 북송 뒤에 처형 당한 사실을 공개하셨는데 이강산 국군포로 일가 사례와 좀 비슷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북한에서 국군포로 가족들이 당했나’고 반문했을 때 이승식 일가족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재원 물망초 인권연구소장은 개회사에서 북한에 억류된 8만3천여 명의 국군포로 중 생존자가 몇 명인지, 한국 정부는 이들을 송환할 생각이 있는지 답답하다며 국군포로 문제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북한에 송환을 끈질기게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앞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지난 2014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이 최소 5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고 이 중 약 500명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산한 바 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