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60주년 현장을 가다]아픈 상처 딛고 역사적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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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박성우 xallsl@rfa.org

지난 1948년 발생해 2만5천에서 3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생긴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해방 전후, 이념 대립의 갈등이 빚어낸 비극적인 역사는 후세대들에게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반세기를 지나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뤄진 4.3 사건의 현장, 제주도는 이제 평화와 인권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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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희생자 진혼제가 열리고 있다. RFA PHOTO/박성우

(기내방송) 우리 비행기는 태고의 신비가 가득한 섬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한반도 남단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

4월과 5월 사이에 섬 곳곳에 활짝 핀 노란색 유채꽃은 제주도의 명물 중에 하나입니다.

예전부터 신혼 여행지로도 인기 있는 제주도에는 요즘 결혼철을 맞아 신혼부부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유채꽃이 핀 해변을 따라 신혼부부들이 유유히 거니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휴양지, 제주도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60여년전 이맘 때,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비극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3.1절 28주년 기념집회에서 민족독립국가 수립을 촉구하던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이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도 전역에 긴장이 조성됐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를 남한의 5월10일 단독선거 반대 투쟁에 접목시켜 1948년 4월3일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면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제주도 4.3사건이 시작됐습니다.

제주 국제공항에서 30분 남짓 달려 다다른 곳. 이곳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립니다.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7-80을 넘긴 할머니들은 4.3사건 당시 이 마을에서만 하루를 사이에 두고, 400여명이 사망했다고, 당시 참상을 말합니다.

마을주민: 아이고 그때 생각하면 몸서리증이 나가지고... 그렇게 또 죽어야 한다면 우린 여기서 땅 파서 엎드려서 죽어 버릴 거야. 약 먹고 그냥 여기서 죽어 버릴거야.

지난 1949년 1월 17일. 북촌리를 지나던 군인 2명이 무장대의 공격으로 숨지자, 인근에 주둔했던 진압군이 출동해 마을 400여채 집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 1,000여명을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은 다음 300여명을 사살했습니다.

그 다음날 진압군은 살아남은 북촌리 주민들 중 옆 마을로 소개해 간 주민 100여명을 다시 사살했습니다. 이른바 ‘북촌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마을주민: 4.3사건 끝나고 나서 산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한 50명 정도가... 전부 학교 마당에 가서 죽여 버리니까...

1949년 1월17일, 음력으로는 12월19일에 발생한 ‘북촌사건’ 때문에 이 어촌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2월18일과 19일이면 거의 모든 집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마을 주민: 다 울지요. 죄 없는 할아버지들 다 돌아가셨으니 다 울지요. 집도 다 불타 버리고. 와서 죽여 버리니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짜로 억울합니다.

1948년 4.3 사건을 전후해서 1954년 9월까지 제주도 전역에서는 2만5천명에서 3만명으로 추산되는 제주도민들이 사망한 것으로 2003년 12월에 발간된 정부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웅변대회) 저는 4.3때 돌아가신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풀꽃’ 같습니다. 1948년 사상자는...

4월 1일, 제주도청 4층에서는 4.3 사건 60주년을 맞아 어린이 웅변대회가 열렸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하나같이 4.3 사건이 오래 전 일이지만, 어른들의 입을 통해, 역사 기록을 통해 알고 있다며 비극적인 과거 역사가 가슴깊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웅변) 풀꽃은 다시 피어났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나이 어린 제가 4.3사건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자: 4.3 사건이 뭔지 알아요?

어린이1: 억울한 희생자요.

어린이2: 옛날 1948년 4월3일에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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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추모행사의 하나로 열린 어린이 웅변대회. RFA PHOTO/박성우

어린이3: 불쌍한 사람들을요...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해 주는 거요.

4.3 사건은 역사의 비극으로 묻혀 있다 1980년대 들어 해방전후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사회적인 관심도 높아지게 됩니다.

지난 1988년에는 4.3 사건 40주년을 맞아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제주도내 대학생과 재야단체의 집회가 이어지고, 서울과 일본에서도 자료집과 증언 채록집이 출판돼 4.3 사건에 대한 관심은 제주도를 넘어 외부로 확산됩니다.

1997년, 전국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제주 4.3사건 5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를 발족한 뒤 정부에 양민학살 사실 인정과 자료공개를 요구하고 국회에는 4.3 특위 구성, 4.3 특별법 제정과 명예회복 조치를 촉구하는 등 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합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국민화합 차원에서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됐습니다.

그리고, 3년만인 2003년 진상규명위는 4.3사건 55년만에 정부차원의 '진상보고서'를 채택합니다.

TV뉴스: 정부는 오늘 4.3사건 특별법이 공포된 지 처음으로 1,715명을 이 사건의 희생자로 결정했습니다.

진상규명위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는 내용의 4.3 사건 진상보고서를 발표하고 정부차원의 사과와 희생자 지원을 건의합니다.

그리고, 2003년 10월말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합니다.

노무현: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5년이 지난 지금, 제주도는 현재 4.3사건 60주년을 맞이해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애도의 시) 까마귀 소리 처량한 울음 따라 눈물마저 말라버린 한 많은 세월...

4월 2일 오전 11시. 제주항구 제2부두 뒤편 주정공장 옛터에서는 4.3 사건 당시 이곳에 수용됐다가 전국 각지 교도소로 끌려간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이들을 위한 진혼제가 열렸습니다.

4.3희생자유족회 김두연 회장입니다.

김두연: 님들이 평소 오고 싶었던 고향땅 제주에 모시는 행사를 하였습니다. 유족들과 통곡과 원망과 눈물을 먹으며 유해 한 조각 없는 혼백상자를 껴안고 귀향하였습니다.

진혼제에 참석한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60주년을 맞은 4.3사건이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했다고 말합니다.

김태환: 이제 제주 4.3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 나고 있습니다. 개인사에서 환갑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듯,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제주4.3도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해질 무렵. 제주시청 앞으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4.3사태 60주년 전야제를 보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시민들은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릴 4.3사건 60주년 본행사인 위령제에 하루 앞서 이곳 제주시청 앞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60년 전 제주도를 되새기며 제주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시청 앞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성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