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평양사범대 교수: “김정일은 자유세계의 상점을 방문해봐야”

미국 예일대 초빙교수로 있는 김현식 씨는 북한의 평양사범대학 교수로 40년 가까이 재직하다 1992년 남한에 망명했습니다. 김 씨는 재미교포인 자신의 누나와 42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하고, 누님의 강력한 망명 권유를 뿌리쳤지만 결국 자신과 누나의 상봉을 북한 당국이 눈치 채게 돼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장명화 기자가 워싱턴을 방문한 김 교수가 망명하게 된 동기 등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현재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예일 대학교의 신학부 초빙교수로 미국에 체류 중인 김현식 교수가 남한으로 오게 된 것은 비참한 운명의 장난 같은, 기가 막힌다는 말 이외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최근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이 회견에는 김 교수와 함께 미국에서 집필과 출판 작업을 돕고 있는 부인 김현자 씨도 함께 했습니다.

김현식: 내가 올 사람이 아니죠. 내가 50년 동안 (노동당 ) 당원이었어, 50년 동안. 김현자: 당원의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 사람들은 몰라요. 김현식: 김일성 처갓집에 가서 20년 동안 가정교사를 했어. 김일성의 처남네 집에 가서. 그리고 내가 김형직 사대 (현재 이름. 개명 전 이름은 평양사범대) 제 1회 졸업생이니까 최고죠. 그리고 러시아에 교환교수로 갔으니까. 북한에서 러시아로 교환교수로 간 사람은 딱 2명밖에 없어요. 그 중의 한자리지. 가서 러시아국립 사대에서 가르치니까 러시아정부가 귀화하라 (책상을 치며 강조), 러시아로. 당신 같은 사람은 없다. 동시에 남한 안기부가 와라. 그러나 내가 둘 다 “No"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 시카고에 있는 누님을 데려왔어. 전쟁 시기에 서울로 갔다가 시카고로 이민 온 누님을 42년 만에 러시아에서 만났어요. 누님이 와서, 42년 만에 만났으니까 어떻겠어요. 누님이 ‘야, 가자, 남으로, 미국으로.’

이런 누님의 눈물어린 요청도 김 교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밝혔습니다. 왜냐하면, 김 교수 자신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탄에 맞아 머리와 옆구리 등에 심한 파편상을 입어 죽음의 문턱까지 드나들던 상이군인으로서 상당히 좋은 예우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틀어져 북한정보당국이 누나와의 만난 것을 발견해, 죽을 위험을 당하게 되자,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고 김 교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김현식: (그런 누나의 요청에 저는 물었어요) 왜요? 14살 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어머니가 집사였어요. (어머니 말씀이) 3남 3녀인데 우리 집에서 목사가 딱 1명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막내인데 나를 지명하시면서 “네가 목사가 돼라”고 말씀하셨어요. 교회 유년주일학교 선생 꼭 하고 신학대학에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누님이 오셔서 어머님 유언대로 네가 해라. 내가 시카고에서 이 나이에, 70에, 여기까지 왔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면서 빨리 가자고 했는데 나는 ‘안가겠다, 내가 왜 가냐?’ 고 했어요.

그런데 누님이 떠난 다음날에 북한 정보부에서 ‘내일 평양으로 빨리 들어가라’ 스파이가 벌써 대준 거요. 누님이 왔다 갔다고. 내가 (평양에) 들어가면 그날로 내가 죽어요. (목이 잘리는 흉내를 냄). 왜 누님하고 승인 없이 접촉 했냐, 왜 남쪽 안기부하고 접촉 했냐 심문당한 뒤, 가족하고 나하고 몽땅 다 죽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남한 안기부에서 나를 교인들 집에 숨겨주었어요. 그리고 북한의 경계가 뜸해진 사이에, 6개월 지난 다음에 큰 러시아 화물선에 짐에 싸여서 그렇게 해서 왔어요. 야, 참...

이렇게 뜻하지 않게 시작된 자유세계의 13년간 생활에서 가장 놀라왔고, 지금도 여전히 부러운 것은 남한과 미국 상점 등 자유세계의 풍부한 물자라고 김 교수는 말합니다. 그는 북한의 김정일 군사위원장이 서방세계를 방문해, 한번이라도 물건이 넘쳐나는 상점들을 둘러본다면 북한이 자유시장 경제를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현식: 빨리 북한을 자유국가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심정이에요. 여기 상점에 들어가 보면 이게 지상낙원이지. (북한에서는) 식료품 상점, 공호품 상점이라고 해요. 상점에 들어가 보니까, 이것 정말 김정일이 한번 갖다가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이 사람(부인을 가리키며)갈 때 상점에 더 이상 가질 않아요. 정말이지 김정일한테 미국, 남한 상점을 한번 보여줘서 이런 것들을 많이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즉 북한경제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계획경제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유경제, 자유 시장경제를 해야 이렇게 잘 살수 있다는 것을 김정일이 한테 빨리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한편 남한에 간 지 7년째 되는 해 김 교수는 한자어가 대단히 많은 남한어를 날마다 연구하여 모은 자료를 엮어, “남북한 한자어 어떻게 다른가”를 펴냈습니다. 이어 2000년과 2001년에는 각각 “북한 주민이 알아야 할 남한 어휘 3300개”와 “남한주민이 알아야 할 북한 어휘 2000개”를 출간했습니다. 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김 교수가 처음 남한어로 된 성경을 보고 너무 어려워 읽을 수 없었던 경험을 살려, 지난해에는 북한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남과 북이 함께 읽는 성경이야기’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김 교수는 영어학습 교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학생들을 위해 미국인들과 협력해 영어교재를 집필 중이며, 종교단체 등 비영리단체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제공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장명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