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 김원형-김미자 부부

매주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삶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남한의 보금자리’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순서로 김원형-김미자 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김원형 씨는 지난 1997년 5월 일가족 6명과 함께 35톤급 목선을 타고 북한을 탈출해 서해상 통해 남한에 입국했습니다. 담당에 이진서 기자입니다.

올해 64세인 김원형 씨는 탈북 당시 총참모부 제 577군부대에서 외화벌이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김 씨는 남한 행을 결심한 뒤 중국에서 고기잡이용 어선을 구입해 북한으로 들여가 평안북도 선천에서 자신의 남한 행을 알고 있던, 안선국 씨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김원형 씨는 서해의 공해룰 통과해 남한 땅을 밟기까지 11시간 정도가 걸리는 위험한 길이었지만 집단 탈출에는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해상탈출을 시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김원형: 몇 번 죽을 뻔 했습니다. 배를 살 때 정비를 해서 육상에 올려놓은 배를 샀습니다. 그런데 목선을 물에 띄어 놓으니까 평소에는 모르겠는데 - 그때 파도가 5미터 높이로 쳤어요 - 그러니까 목선이 파손돼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한쪽으로는 물 퍼내면서 ...한국 땅을 갔죠.

김원형 씨는 부인 김미자 씨 그리고 아들 셋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함께였고, 안선국 씨 가족 등 당시 배에는 모두 14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탈북 당일에는 비바람이 치고, 안개가 끼어서 기상조건이 최악의 상태였고, 배에 물이차서 침몰하기 직전에 기적처럼 남한해군에 구조가 됐다고 합니다.

김원형: 남한 해군이 와보니까 중국 배에 중국 깃발을 꼽았지, 차림새도 중국 옷차림이지... 보더니 그냥 구조를 안 하고 그냥 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정말 죽는구나 생각 했는데 사령이 살려 달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함장한테 보고를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김원형 씨는 남한에 입국한 뒤 1.4후퇴 때 헤어진 쌍둥이 동생을 50여년 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동생과 80된 어머니는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올해만 두 차례나 방문 했었다고 합니다.

김원형: 그 사이 내가 미국을 두 번 정도 갔어요. 친척분이 많죠. 뉴욕에도 있고 뉴저지에도 있고 ... 아무래도 자기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얼굴 모습이 저하고 비슷하기 때문에 알지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몰랐을 겁니다. 같은 혈육이니까 생활 체제에 대한 것은 다를 수 있지만 감정이야 같죠.

어느덧 남한 생활 7년이 된 김원형 씨는 그동안 남한 내 탈북자들로 구성된 단체인 숭의동지회 사무국장을 한 것 말고는 특별히 직업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탈북자들처럼 개인 사업을 벌려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김 씨는 최근 그동안의 생활을 정리하는 개인 수필집을 구상하고 집필 중에 있다고 합니다.

김원형: 생활 수기나 같죠. 지난 과정을 쭉 나열한 것인데... 북한에서 생활한 것과 남한 생활을 전부 포괄해서 지금 쓰고 있는데 완성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 2백 쪽 되는데. 북한에서 살다 남한에 와서 체험한 그런 것인데 서로 체제가 다르니까 정치, 생활관 등도 다르잖습니까. 북한은 자유경쟁 체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한에 와보니까 모든 것이 경쟁 사회니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니까 여러 가지 다른 것도 나타나더라고요.

한편 북한에서 사진사 출신의 부인 김미자 씨는 남한에 도착한 뒤에는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가족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김미자: 사진 찍었습니다. 종합편의에 가서 그걸 찍었습니다. 미장원이나 양복점이나 그런 편의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한 7년 찍었습니다. 애들 학교 보내서 취직도 시키고, 내가 나가서 일하지 않으니까 집에서 아이들 뒷바라지나 했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 와서는 여기 돈 쓸 줄도 모르고 했는데 이제 7년 되니까 그런 것은 여기 사람들 하고 똑같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미자 씨는 7년간의 남한생활 중에서 지난 3월초 막내딸 순희 씨를 미국 동포한테 시집을 보낸 것이 남한에서 경험한 제일 큰 행사였다고 말하고 당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김미자: 어려움이 많았어요. 여기 방식을 모르니까...신랑은 여기서 살다가 갔으니까 여기 혼사 방식을 알고 있는데 우리는 몰라서 먼저 결혼식 한집의 실례를 듣고 해서 했습니다. 기둥뿌리 하나 뽑혀졌어요.

김미자 씨는 북한에서는 조직에 매여 살지만 남한에서는 자유로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제일 좋은 점이라고 말하고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 둘을 돌보면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미자: 주변에도 나가 다니고, 살림 하려면 여기저기 부식물도 해결해야 되겠고 하니까 나가고 그래요. 음식은 여기 식으로도 해먹고, 재료는 여기 사람처럼 못하고 아껴서 쓰고 그럽니다. 아무래도 북한에서 습성이 있고 해서 아껴서 쓰고 합니다.

한편 김원형 씨의 세 아들은 모두 남한에서 틀니 (의치) 등을 만드는 치기공 전문대학을 나와 일하고 있고 막내딸 김순희 씨는 미군에 근무 중인 한인동포와 결혼해 현재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진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