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목숨바칠 가치 있는 나라"
(인트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을 찾아 그들의 육성을 직접 담아내고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투가 더 이상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지구 두 바퀴 거리를 이동한 전 미국연방의회 한인보좌관의 방문행적이 화제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한국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한나 김씨가 전세계를 돌며 만난 유엔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과 오늘의 이야기를 이틀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한나 김씨와 함께 한국전 참전군인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저는 김진국입니다.
<< 7네덜란드 - 한국사랑 깊은 의료지원국 (2/23 -2/26)>>
(한나 김) 암스테르담에서 100여 km 떨어진 스하르스베르헌에 있는 한국전쟁 박물관은 2010년 문을 열었습니다. 참전용사 할아버지 네 분이 오전 일찍부터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김진국)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한때 대 제국지위를 유지했던 네덜란드의 군사력은 다소 약한 편에 속했습니다. 한반도의 심각한 전쟁 상황이라는 유엔사무총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처음에는 육군을 파병하고자 했으나 한 주간의 숙고 끝에 네덜란드 정부는 내부적 군상황에 비추어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합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대한 육군 파병의 지지 여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자 많은 수의 시민이 군입대와 비영리 기구를 통한 참전을 자원했고 네덜란드 정부는 마침내 1950년 11월에 3천972명 지상군과 해군 구축함 1척을 파견합니다. 한국전쟁에 5천 여명이 참전해서 120명이 사망했고 645명이 부상 당했으며 전쟁포로가 됐던 2명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군인들은 모두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한나 김) 참전용사들은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셨습니다. 한국에서 만났던 많은 한국인 전우들의 이름을 따라 딸 이름을 "킴"으로 지었다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중요한 모임 때마다 태극기가 수 놓아진 군복을 입으신다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만난 친구들 처럼 사후에 부산에 있는 유엔 묘지에 안장되기를 원하는 할아버지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셨지만 피에트 할아버지는 다른 분들과 달리 한국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계시고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한국사람들이 참전군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방문국의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은 대부분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면서 미국에서 온 나를 흔쾌히 만나주시며 반가워합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하시기도 합니다. 피에트 할아버지처럼 한국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고 아직도 악몽 속에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 8벨기에"한국은 목숨을 바칠 가치 있는 나라, 내 두번째 집" (2/24 -2/27) >>
(김진국) 벨기에 즉 벨지끄는 한국전쟁에3천 171명이 참전해서101명이 사망하고500여 명이 부상 당했고 2명이 실종됐다고 합니다. 현재 생존자는 700명 정도라고 하네요.
(한나 김) 처음 만난 참전용사인 98세 피에르 할아버지는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100세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주 건강하셔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손짓, 몸짓에 얼굴 표정을 총 동원해서 생생하게 당시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피에르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한국전쟁의 첫 단어는 '추위'였습니다. 임진강 도강 작전 중 한가지 물품만 가지고 갈 수 있었는 데 피에르 할아버지는 침낭을 선택했을 정도였습니다.
(김진국) 피에르 할아버지가 전해 주신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출전해 벨기에에 아주 값진 동메달을 선사한 육상 영웅 에티엔 게일리 선수도 기꺼이 조국의 부름에 응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합니다. 게일리 선수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뛸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정도로 연습과 전투를 병행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전쟁 도중 다리에 부상을 당해서 이후 다시는 마라톤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분의 동생도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동생이 탔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습니다.
<< 9룩셈부르크가 참여한 유일한 해외전쟁 (2/27 -3/4)>>
(한나 김) 룩셈부르크 역에 내리니 룩셈부르크 한국전쟁참전군협회 분들이 마중 나와주셨고 이튿날에는 나를 위한 모임이 한국-룩셈부르크 친선협회 회장님 집에서 열렸습니다. 2명의 참전군할아버지가 오셨는데 툰(Tun)할아버지와 리(Lee)할아버지였습니다.
(김진국)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83명이 참전해서 2명이 사망했고 13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생존자가 모두 9명인데 그 중 2명은 캐나다로 이민갔고 현재 룩셈부르크에 사시는 참전군인은 7명이라고 합니다. 룩셈부르크는 당시 인구가 20만 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엔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전투부대인 대대규모 병력을 자체적으로 편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벨기에 대대의 중대에 편입되어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나 김) 툰 할아버지는 90살이신데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하셨습니다. 미 해병대와 함께 작전 수행을 했는데 엄지손가락을 세우시며 "미 해병대가 최고"라고 하셨습니다. 툰 할아버지와 제일 친한 친구인 87살 리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이름을 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룩셈부르크인이지만 아버지가 러시아 군 장교여서라서 러시아계 성(Last name)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적국으로 참전한 러시아(당신 소비에트연방)여서 이후로는 성을 버리고 'Lee'라는 이름만 쓴다고 하셨습니다.

<< 10 프랑스 , 개선문 아래 있는 한국전기념비(3/5 – 3/8) >>
(한나 김) 열차로 프랑스로 이동한 다음날 참전군인 할아버지 3분을 만났습니다. 만나는 장소는 파리 동쪽에 있는 부유층 도시인 생망데(Saint-Mandé)의 시장실이었습니다.
(김진국)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지상군과 해군을 파견했습니다. 프랑스 지상군은 한국전 파병을 위해 "프랑스 대대"를 새로이 편성하였고1950년 11월에 부산항에 입항해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프랑스 센느 강변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유일하게 북한과 남한을 합친 완전한 한반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3천421명이 참전해서 262명이 전사했고 1천350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나 김) 한국에 온 프랑스 군인들은 대부분 자원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을 강타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반도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서 자원했다고 합니다. 3명 할아버지 중 람보트 할아버지는 약혼녀가 한국의 전투지와 결혼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가지 못했다는 일화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김진국) 개선문은 파리의 상징이자 프랑스를 방문하는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때 희생당한 프랑스인을 기리는 곳이기도 한데 많은 사람들이 모르겠지만, 이곳에도 한국전쟁을 위한 기념물이 있습니다. 개선문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묘가 있고 1차 세계 대전을 상징하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만 한국 전쟁 기념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듯 합니다.

<< 11이탈리아, 유엔 미가입국이었지만 연합국으로 참전 (3/9 – 3/11) >>
(한나 김)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이탈리아 군역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봐도 한국전쟁은 이탈리아의 해외전쟁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 사이트가 많습니다. 이탈리아가 적십자를 통한 의료 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김진국) 이탈리아는 군부대가 아닌 50명의 장교와 7명의 의사, 6명의 간호사 그리고 한 명의 목사를 한국에 보냈습니다. 이탈리아 적십자사에 의해 편성된 병원 부대라는 의미로 '이탈리아 제 68적십자 병원'을 새긴 수송선은1951년 10월 16일 이탈리아를 출항하여 1개월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 병원은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1953년 7월 27일까지 1천604명의 입원 환자를 돌봤고, 7만 4천 명의 통원 환자를 진료했으며 3천 300여건의 수술을 했습니다.
(한나 김) 이탈리아 참전군인 중 유일한 생존자이신 지오바니 리볼디 할아버지는 한국나이로 94세셨는데 심장수술을 3번이나 하셨지만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습니다. 리볼디 할아버지는 한국에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계셨고 방사선 의사로 의료 봉사를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 왜 멀고 먼 나라인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할 생각을 하셨냐고 여쭤봤더니 할아버지는 한국이 공산당과 싸우는 것을 돕고 싶었고 당시 27살 청춘이었던 만큼 새로운 모험을 찾아 가고 싶었다고 답하셨습니다.

<< 12그리스, 민주주의 발상지민주주의 사수 위해 참전 (3/12 – 3/16) >>
(김진국) 1950년 채택된 국제 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호에 따라 '스파르타 대대'라 불렸던 그리스 육군 등 849명의 전투병력이 그해 11월 한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5천 명이 참전했고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5년여간 1만 2천 명의 그리스 군인들이 한국에 가서 전쟁 복구와 성장을 위한 지원 활동을 했습니다. 전쟁으로 사망한 그리스 군인들은 약 200명이고 600명 이상 부상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스 왕국은 한국 파병 국제 연합군 중 5번째로 많은 부대를 보낸 국가입니다.
(하나 김) 놀랍게도 그리스 참전용사 중에 한국 할아버지가 계셨다. 한국 이름이 장려상이라는 알렉산도로스 할아버지는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일뿐만 아니라 부회장이십니다. 평양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14살이었던 1950년 12월 얼어붙은 대동강의 헤엄쳐 월남한 후 그리스군의 군수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군무원으로 일하다 그리스어를 배운 후 부대장 통역원으로 진급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살에 그리스 군의 초청으로 아테네 대학의 첫 한국인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 여인과 결혼했고 군납 사업으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알렉산도로스 할아버지는 한국과 그리스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셨고 나를 위해서도 기꺼이 통역을 해 주셨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미국의 전직 연방의회 수석보좌관이었던 한나 김씨가 전세계를 돌며 만난 유엔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과 오늘의 이야기를 전해드린 자유아시아방송의 한국전쟁 특집방송 2편 "한국은 목숨바칠 가치 있는 나라" 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