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텔레비전. 텔레비전 화면에는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와 양가 부모들이 함께 '오직 한마음'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낯익은 모습과 친근한 노래. 가슴이 반가움으로 뻐근해졌습니다.
텔레비전 앞에는 제 친구와 저는 처음 만나보는 친구의 고향 친구가 나란히 앉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습니다. 놀라는 저를 보고는 고향에서 가져온 결혼식과 환갑잔치 때 찍은 록산기 테이프라고 친구가 설명을 합니다. 고향에서 가져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설명에 저는 처음부터 다시 돌려서 보자고 했습니다.
고향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결혼식 장면과 환갑잔치 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평양에 있는 저의 조카도 3년 전에 결혼을 했다니 저렇게 고왔을텐데... 우리 언니도 이제 환갑인데... 이런 생각을 하니 눈물은 더 쏟아졌습니다.
저는 텔레비전 화면을 제 손전화기에 찍어도 보고 노래도 흥얼흥얼 따라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노래는 모두 충성심에 대한 노래라 노래의 곡은 익숙해도 가사는 영 어색했습니다. 이곳 남한의 생활 6년에 중국 생활 6년, 당연히 북한 생활 방식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라는 말도 있듯, 우리는 잠깐 사이 친해졌습니다. 친구의 고향 친구는 이곳 남한에 온 지 한 달이 됐다고 했습니다. 2007 년에 찍은 사진이 담긴 록산기 테이프였는데 작년에 중국에 가져다 놓았다가 이번에 이곳 남한으로 오면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록산기로 찍어온 화면은 조카 결혼식과 언니의 환갑잔치로 남한에 정착한 동생이 5000 달러를 보내줘서 성대하게 치렀다고 합니다. 이제 내 고향도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얘기가 새삼 와 닿았습니다.
합법적이진 않지만 남한에 정착한 친지가 돈을 보낼 수 있고 이렇게 록산기로 결혼식이나 환갑잔치를 찍을 수도 있고, 서울에 사는 제가 이렇게 고향 잔치 모습을 안방에서 볼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일부분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고향의 모습은 제가 떠나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록산기 테이프에서 신부는 추운 겨울인데도 유행이 지난 얇은 한복을 입었고 승용차가 아니라 지프차를 타고 김일성 동상에 찾아가 절을 했습니다. 저녁에 전깃불 대신, 아직도 기름 등잔에 불을 켰고 사람들이 잔치를 하는 좁은 방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창문과 문에 담요를 쳐 놓았습니다.
그래도 친구의 조카는 시골이지만 집안이 괜찮아 지프차라도 탈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시골에서는 차는 생각도 못하고 달구지나 트락또르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걸어서 시집을 가기도 한답니다. 아직도 30년 전, 제가 결혼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큰 행사인데 말입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 큰딸을 출가시켰습니다. 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와도 같아서 그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흰 눈같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과 함께 예식장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쁜 꽃을 단 승용차를 타고 비행장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 노망 섞인 말이지만 저도 다시 결혼이라는 걸 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환갑이 된 부부들이 다시 웨딩드레스를 입고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는 심정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저 신랑 신부는 기름 등잔불 연기에 코가 시커매지는 것도 일생의 추억이 되겠네." 하는 말에 떠들썩하게 웃긴 했지만, 웃음의 끝에 쓴 맛이 났습니다.
다음 번 고향에서 전해지는 록산기 테이프에는 우리가 잡념 없이 '허허허' 크게 웃을 수 있는, 행복한 고향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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