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1950년 납북된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서…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진행에 이승재입니다.

지난 5월 20일(현지시간), 뉴욕의 유엔본부에서는 북한 당국의 주민 인권 침해를 다루는 유엔총회 고위급 회의가 열렸는데요. 국제인권단체와 탈북민들이 발언자로 나서서 북한의 인권 침해 실상을 유엔 회원국들 앞에서 낱낱이 증언했지만, 북한의 대표자인 김성 주유엔대사는 이날의 회의 내용도 “숨은 세력에 의한 책략과 조작”이라는 적반하장식 주장을 펼쳐서 자유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 분노케 했습니다. 도대체 북한의 인권 유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누군가는 “바로 이 사건이 시작”이었다고 말하는데요. 오늘 [여기는 서울]에서 들어보시죠.

지난 5월 31일 아침 9시,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엔 약 4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이날 한국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주최한 행사 ‘서울, 전시납북의 길 따라걷기’에 참여하려고 모였답니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독립문 앞에서 휴대폰을 이용해 전시납북 관련 내용을 검색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독립문 앞에서 휴대폰을 이용해 전시납북 관련 내용을 검색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독립문 앞에서 휴대폰을 이용해 전시납북 관련 내용을 검색하고 있다. (RFA)

1950년 시작된 6.25 한국전쟁, 이때 인민군의 강제 납치로 북한에 끌려간 사람들은 자그마치 10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집니다. 분단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인데요. 애타는 가족들과 점점 잊혀지는 피해자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그분들이 잡혀서 끌려갔던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걸어보며 ‘절대 잊지 말자’는 의미로 이 행사를 기획했다고 합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지윤 팀장의 설명입니다.

(이지윤) 우리가 왜 서대문형무소에서 이 길을 시작하는 지 궁금하신 분도 계실 거예요. 전쟁 나고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뒤에 인민군이 바로 여기 서대문형무소를 접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울 출신 납북자들의 1/3이 여기 구금되었다가 북한으로 끌려가게 됐다고 해요. 그런 이유로 우리가 여기서 시작하는 겁니다. 납치는 85%가 이때부터 3개월 이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전쟁 시 북한에 납치된 인원이 10만 명이 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네요. 상당수가 표적 납치였습니다. 의료인, 사업가, 종교인, 사회 지도자, 공무원 등입니다. 기록에 보면 이미 1946년에 김일성이 이미 “남한의 주요 인사를 데려올 데 대하여”란 문서로 교시를 내렸습니다. 북한에 인텔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남한에서 납치를 통해 데려오겠다는 명백한 목표가 있었고요. 조직적인 납치가 이뤄진 거죠. 피해자의 상당수가 집과 직장 근처에서 당했다고 합니다”

설명을 듣는 시민들에게 기자가 조용히 말을 걸어보니 사실상 이 분야에 관심이나 지식이 있어서 온 시민들은 대여섯 명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온 시민들도 거의 없었죠. 거의 대부분이 인터넷 광고를 보고 그저 조금 더 알고 싶어 찾아온 경우였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한번 서로 소개해 볼까요? 자기 소개 한번 해 주시죠.

(시민들) 저는 스무 살 송창섭이라고 합니다. 이영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박준목이고요. 영화 만들고 있어요. 저는 19세 이선정입니다.

어떠신가요? 아직은 모두 어색한 이 분위기, 여러분도 느껴지시죠. 그러나 대부분이 쉬고 있는 토요일 아침에 이 곳으로 달려온 만큼, 북한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는 열정은 가득합니다.

(정요환)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정요환인데요. 북한의 납치와 탈북민 연구하는 과정에서 좀더 심화 공부를 하려다 보니 인터넷으로 이 행사를 알게 됐어요. 중3 때 한국사 선생님이 북한 관련 내용을 정말 말씀 많이 해주셔서 그때부터 북한에 관심이 많아졌고, 문재인 대통령 때 남북정상회담 하는 걸 보면서 북한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에 납북자들이 걸었던 그 길을 한걸음씩 내딛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작해 경복궁으로, 경복궁에서 광화문으로, 광화문에서 종로를 거쳐 서울대학교병원이 있는 혜화동 로터리로, 혜화동에서 오늘의 종착지인 미아리고개로… 약 5~6시간을 걷는 일정입니다. 중간중간 잠시 쉬어가면서 진행자를 통해 당시 납북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지요. 지금은 서울이 제법 발전되어 많은 길은 평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대부분의 길이 가파르고 험준한 언덕이었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모를 그 길을 걷는 피해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진행자) 아래 보시면 사직터널이 있습니다. 196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뚫린 터널입니다. 1950년 전시 납북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죠. 지금 우리도 이 길이 힘든데, 당시 피해자 분들은 대부분 밤에 끌려갔고요. 손이 묶인 채로 줄줄이 끌려갔는데 춥고, 덥고, 배고프고 정말 힘드셨을 거예요.

참여자들은 벌써부터 땀이 나고 지칩니다.

(기자, 걸으면서) 지금 좀 힘들지 않아요?

(대학생들)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요. 저는 성균관대 다니는 황승헌이고요. 저는 중대 다니는 송창섭입니다.

(기자) 두 분이 지금 여기서 처음 만난 거죠? 반갑지 않아요?

(대학생들) 네. 반가워요. (웃음)

(황승헌) 저는 북한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인데 연구를 하다 보면 북한 관련된 정보들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행사를 통해 제가 뭔가 얻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송창섭) 북한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많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대학생이니까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죠. 북한 관련 행사는 전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혜화동 로터리에 도착했습니다.

전시납북의 길을 따라 걷는 서울시민과 외국인들.
전시납북의 길을 따라 걷는 서울시민과 외국인들. 전시납북의 길을 따라 걷는 서울시민과 외국인들. (RFA)

(진행자) 가족들은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정말 애썼습니다. 1950년 9월 28일 다시 서울을 수복된 이후부터 납북자 가족들은 피해자들의 행방을 알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요. 또 1951년에 가족회가 결성되면서 이 문제를 사회에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장면 총리 여동생도 납치되었어요. 그래서 그 가족을 중심으로 평양에 구호단을 보내는 등의 노력들도 시도해 봤습니다. 그러다 정전협정을 맺었고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남한 정부에선 주요 의제로 다루지 않았으며 북한에서도 납치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다양한 노력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 1954년에 가족들은 다 같이 모여서 이들을 송환해 달라고 궐기를 일으킵니다. 그때 찍힌 사진이 있어요. 당시 납북자의 98% 이상이 남성들이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여기 사진을 보면 여성들이 줄 서서 증언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광화문에 가서 다음 얘기 또 들려드리겠습니다.


관련기사

납북피해가족연합회 “생사확인 때까지 대북전단 날릴 것”

통일부 장관 “납북·억류자 문제 해결, 기억과 공감서 시작”


(외국인들) 자, 이제 출발! 갈게요. 또 갈게요.

그런데 가만 보니 행사를 기획한 북한인권시민연합 측 관계자를 표시하는, 주황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 중엔 외국인들이 10명 이상이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약간은 어설픈 한국말로 참가자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물이나 필요한 물품을 챙겨주는 등 열심히 돕고 있었는데요. 이분들은 어떻게 여기 있게 된 걸까요?

(한나) 저는 네덜란드에서 온 한나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추천을 받아서 여기서 자원봉사하고 있어요. 고등학생일 때 북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요. 그냥 저는,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다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애나벨) 프랑스에서 온 애나벨입니다. 저는 정치학과 한국학을 공부하는 교환학생입니다. 유럽인들은 북한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어요. 저는 진실을 유럽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참여하고 또 배우고 있습니다.

네. 오늘의 행사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낸 자원봉사자들이었군요. 서울 사람들에게, 그것도 서울의 길을 차분히 안내하고 있는 외국인 학생들의 열정에, 참여자들은 감동하면서 또 간단한 영어로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북한인권시민연합 관계자를 통해 전시납북 당시의 상황을 듣고 있다.
시민들이 북한인권시민연합 관계자를 통해 전시납북 당시의 상황을 듣고 있다. 시민들이 북한인권시민연합 관계자를 통해 전시납북 당시의 상황을 듣고 있다. (RFA)

두세 시간을 걷다 보니 처음엔 굳어있던 참여자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옆에서 걷는 이들은 오늘 대부분 처음 본 사람들이지만 길을 걸으며 대화하다 보니 벌써 친해지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걸었던 길을 뒤따라 가며 강제 납치한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를 함께 느꼈기 때문인지, 서로에 대한 동지 의식도 커집니다.

(정희재) 일단 처음 이 행사를 오게 됐을 때, 이 일이 지금의 북한 인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이 강제 납북 문제가 북한 정부가 어떻게 보면, 가장 처음으로 인권 유린을 시작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빨리 해결을 촉구하는 것이 지금 북한 인권 해결의 시발점에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적극적인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함께 걷는 이들 중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강제 납북으로 아버지를 여읜 표병식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표병식) 우리 아버지는 1950년 7월 28일, 동네 이적단체 회원, 흔히 얘기하는 빨갱이이자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 했던 일꾼이 인민군 3명을 데리고 와서 끌고 갔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경찰이었는데 저는 그때 어머니 뱃속에 있었습니다. 납치 후 5개월 뒤에 제가 태어났는데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없어요. 그런 한 많은 세상을 지금 75년째 살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설움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맘을 먹고 아버지가 끌려갔던 그 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걷기 위해 오늘 여기 왔습니다.

한 많은 75년 인생, 표병식 어르신의 이야기는 밤새 들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요. 이렇게 이야기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종착지인 미아리고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도착 지점에는 표병식 어르신 말고도 전쟁 시에 아버지를 잃은 여러 납북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 또 걷기를 모두 마친 시민들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는 서울]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