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이승재입니다.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 측에 의해 납치된 남한 시민들은 국내외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약 1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분단 75년이 지났지만 생이별을 겪은 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한데요. 지난 5월 31일 한국의 민간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은 납북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서울 전시납북의 길 따라 걷기’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대부분 청년들로 구성된 참가자들은 과거 납북자들이 끌려갔던 길을 똑같이 걸으면서 당시의 슬픔과 고통을 떠올려봤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 소식, 두 번째로 전해드립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작해서 미아리고개까지 걷는 일정, 아침부터 행사에 동참하기 위해 모인 참가자들은 각자 ‘대한민국 해외여권’이라는 모형 여권을 하나씩 받았습니다. 여권 하나하나엔 전쟁 때 납북된 사람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고 인터넷을 연결하면 좀더 자세히 사연을 들을 수 있는 QR코드도 있습니다.
여권마다 실린 인물이 다르니 참가자들은 서로 비교도 해보는데요. 제가 받은 여권엔 ‘이종령’, ‘1909년 9월생’, 전쟁 당시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분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네요.
(이지윤 북한인권시민연합 팀장) 참가하는 분들이 오면 각각 여권을 배정받는데 이분들이 전시납북의 피해자입니다. 걸어가면서 주요 장소에서 QR코드를 이용해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납북의 길을 따라가는 형태입니다.
저도 길을 걸으면서 여권 안의 QR코드를 이용해, 이종령 선생의 딸 이성의 씨의 얘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성의) 제가 세 살 즈음에 아버지는 변호사 개업을 하셨습니다. 6.25 당일, 일요일에 쌀을 사러 나가셨대요. 을지로 살았으니까 그 시장이 왕십리쯤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이상하더랍니다. 평소처럼 문도 다 안 열고 쌀도 없다고 해서… 집에 와보니 누가 연락이 와서 전쟁 난 것 같다고 빨리 아버지한테 피하시라는 전갈이 왔대요. 그러나 자녀가 7명인데다 엄마는 바깥 세상을 모르시니 아버지가 발길이 안 떨어졌겠죠. 피난을 못 가셨습니다. 당시 서울 장충동, 을지로 근처엔 법조인들이 많이 살았다는데 아버지는 그 근처 어디에 숨어 계시면서 매일 남들 눈을 피해 한번씩 우리 집에 들르셨대요. 그러다가 7월 초가 되니까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당분간 못 올 것 같다”면서 나가셨고 그 뒤로 소식이 없으셨답니다. 당시 수원에 사시는 아버지 동료 판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은 집도 머니까 종종 우리 집에서 주무시기도 하셨다네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빨갱이었대요. 그 분이 아마도 아버지를 밀고한 것 같아요.
그렇게 아버지와 이별하게 된 이성의 씨 가족, 그런데 어느 날 사라졌던 아버지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성의) 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서 엄마가 나가보니 그 사람은 자기가 지금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오는 길인데 어떤 영감님이 쪽지를 주셨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계셨던 거죠. 쪽지를 받고 엄마와 큰 오빠가 매일 서대문형무소를 출근하다시피 면회를 갔는데, 단 한번도 아버지를 보여주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그 아버지 친구, 빨갱이라는 분,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서대문형무소 측과 연결을 해달라고 부탁하니 그 분은 “그쪽도 좋은 세상인데 왜 찾느냐고 놓아두라”고 그렇게 답했다네요. 나중에 전쟁 다 끝나고 제 아버지는 납북되시고 그 친구도 월북하고 나니, 수원에 살던 그분의 부인이 저희 엄마를 찾아와서 펑펑 울더랍니다. 남편이 빨갱이인 줄 자신도 몰랐다고요.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
이성의 씨 가족의 아픔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과 7남매가 단란하게 살던 그 행복은 전쟁으로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전쟁 당시, 어린 아이였던 언니 1명은 마당에서 놀다 누가 쏜 지도 모르는 총에 맞아 생명을 잃었습니다. 아버지가 납북되자 전쟁과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언니 1명과 오빠 1명이 황해도 연백에 있는 외갓집에 보내졌지만 전쟁 직후 갑자기 38선이 그어져 손도 써보지 못하고 또 한번의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아픔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와 큰오빠는 남한에서 살다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노인이 된 이성의 씨와 언니 두 분만 남았다고 하네요. 살아있다면 노인이 되었을 북한의 언니, 오빠는 어떻게 살았을 지, 그들은 과연 납북된 아버지를 만났을 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이성의 씨는 수일을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이성의) 아버지! 어릴 때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면서 안기는 걸 보고 엄마한테 “왜 우린 아버지가 없어? 아버지가 뭐야? 이런 말도 내가 물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불러봤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아버지 대신 제가 시아버지 모시면서 정말 잘 했어요. 이 다음에 저 세상 가서 아버지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마음껏 아버지라고 불러볼 거고 같이 살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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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한 맺힌 미아리 고개
오늘 여정의 종착지인 미아리고개까지, 참가자들은 이렇게 각자의 모형여권에 있는 납북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아픔이 결코 생겨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드디어 출발 5시간 후, 미아리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김빛나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김빛나 북한인권시민연합 매니저) 드디어 마지막 미아리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 노래는 1956년에 발매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곡인데요. 이 동네가 돈암동, 안암동 전부 ‘암’자로 끝나거든요. 말이 고개이지 다 산입니다. 미아리는 전시납북이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여기가 납북자들이 북으로 끌려갔던 주요 루트였는데, 납북자들은 여길 넘어 평양과 멀게는 중강진까지 끌려갑니다. 지금 이 노래는 1950년대를 상징하는 노래이기도 하죠. 남편이 납북되어서 북으로 끌려가는 아픔을 아내의 심정으로 그린 노래, 이 전시납북을 관통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여정을 다 마친 참가자들은 작은 커피숍에 모였습니다. 이곳에는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된, 전쟁 당시 납북된 인사들의 자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전시납북의 길 따라 걷기’를 모두 마친 청년들의 손을 한 사람 한 사람 잡으면서 수고했다며 메달을 걸어주었습니다.
(이지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6.25전쟁납북인사가족회의 이성의 이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성의) 우리가 찾고보니 많은 납북의 증거자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12개 납북자 명단이 있는 문서를 찾았어요. 11부는 한국에서, 또 미국CIA가 갖고 있던 납북자 명단도 1개 있었습니다. 또 1950년대의 해군문서와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납북의 증거가 되는 자료를 발굴하게 됐고, 북한의 김일성 전집이나 담화문 같은 문서에서도 기획 납북, 조직적 납북의 근거가 되는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이런데도 북한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10만여 명의 생사 확인만 해달라고 해도 거부하는 중이라, 전쟁 75년이 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납북자 가족들도 이제는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북한 당국의 인정과 해명을 꼭 바라는 이유는 다시는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아픔으로 평생을 보낸 가족들, 북한 당국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언제쯤 세상에 속시원히 알려질까요? 지금까지 <여기는 서울>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