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종군 카폰 신부, 고향서 영원한 안식
2021.09.29
앵커: 6.25 한국전쟁에 종군 신부로 참전했다 숨진 미국의 에밀 카폰 신부가 70년 만에 고향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전쟁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돌봐 ‘한국전쟁의 예수’로 불렸던 카폰 신부의 장례 미사 현장을 박수영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장례 미사 현장음]
29일 캔자스 위치타의 허트맨 대강당.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실종된 뒤 70년 만에 유해로 고향에 돌아온 에밀 카폰 신부의 장례 미사와 성찬식이 엄숙히 거행됐습니다.
[칼 켐] 하나님, 카폰 신부의 유해의 신원 을 확인토록하고 또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중략) 그의 유해가 확인되어 우리의 곁, 캔자스로 돌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가 ‘내 주님은 살아계셔(know that my redeemer lives)’가 강당 내에 잔잔히 울려 퍼지며 신부들과 함께 카폰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관이 천천히 들어왔습니다.
위치타 교구 주교인 칼 켐 신부가 먼저 카폰 신부를 추모하는 기도를 올리며 그의 관 위에 십자가와 성경을 놓았고, 마지막으로 관 주위를 돌며 기도를 마쳤습니다.
이 날 장례 미사를 집전한 켐 주교는 카폰 신부와 함께 참전했던 노병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했습니다.
[칼 켐] 마이크 도우, 폴 로치, 로버트 맥그리비, 베일리 길리스피. 여러분의 증언이 없었다면 저희 카폰 신부의 위대함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모두 일어서서 귀향 전쟁 포로들에게 감사를 전하길 부탁드립니다. (박수)
참석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기립해 박수로 이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했습니다.
켐 주교는 에밀 카폰 신부가 고된 상황 속에서도 어떠한 불평도 없이 전우들을 위해 봉사했다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또 알려지지 않은 그의 선행이 더 많을 것이라며 카폰 신부를 강하고, 용감하며, 동시에 겸손하다고 추모했습니다.
[칼 켐] 카폰 신부의 눈을 직접 바라봤던 사람들은 그의 모습으로부터 예수님을 연상할 수 있었으리라 자신합니다.
이 날 장례 미사에 앞서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21일 일본 도쿄에서 실제 방송됐던 에밀 카폰 신부의 생전 설교 영상이 방영됐습니다.
[에밀 카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고통 속에도, 전쟁 중에도 존재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때도, 분노에 휩싸일때도 심지어 삶과 싸울때도 존재할 것입니다.
영상에는 카폰 신부의 생전 모습과 그의 생가가 담겼고 그가 한국전쟁에서 종군신부로 참전했던 당시 모습도 담겨 있었습니다.
2시간 가까이 계속된 이 날 카폰 신부의 장례 미사에는 백발의 노인을 포함해 성인뿐 아니라 청소년과 어린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미사 현장음-아이들 목소리]
캔자스뿐 아니라 멀리 캘리포니아, 유타, 아이오와주 등 미국 전역에서 온 추모객들도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리안 팩터] 저는 아이오와 스프릿 레이크에서 왔습니다. 남편이 군 복무중에 있어서 (카폰 신부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카폰 신부가 명예 훈장을 받기 전인 2012년부터 남편이 라일리 부대에 주둔했습니다. 그 당시 필슨에 방문했었고요. 그 이후로도 계속 카폰 신부에 대해 소식을 접했습니다.
장례 미사를 마친 카폰 신부의 관은 성조기에 둘러싸여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로 위치타 성당 (Cathedral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으로 향했습니다.
마차 뒤로 그의 유족인 조카 레이 카폰 씨, 위치타 교구의 신부들 그리고 재향군인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습니다.
재향군인 기념공원부터 위치타 성당까지 1.2 킬로미터 가량 이어진 행렬을 지켜보기 위해 나온 추모객들로 거리 양 옆은 가득 찼습니다.
성당에 도착한 카폰 신부의 유해는 대리석 관으로 옮겨져 지하 묘지에 안치됐습니다.
전장에서 아군은 물론 적군 부상병까지 돌보며 인류애를 몸소 실천한, 진정한 전쟁영웅, 카폰 신부가 70년 만에 돌아온 고향 땅에서 마침내 영원한 안식에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캔자스 위치타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수영입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박정우,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