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끝내 돌아오지 못했던 에밀 카폰 신부(Fr. Emil J. Kapaun)의 유해라도 되찾길 고대했던 유족들의 소원이 최근 이뤄졌습니다.
유족들은 이 달 중순 미 하와이주에 본부를 둔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을 방문해 카폰 신부의 유해를 70년 만에 직접 확인했습니다.
삼촌의 이름을 따 자신의 가운데 이름도 '에밀(Emil)'로 지어졌다는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 카폰(Ray Kapaun) 씨는 삼촌을 처음 만날 수 있었던 이번 하와이 방문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RFA 자유아시아방송에 설명했습니다.
[RFA 6.25 특집]'한국전 예수' 카폰 신부의 귀향,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한덕인 기자가 조카 레이 카폰 씨와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기자: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최근 하와이에 있는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을 방문해 에밀 카폰 신부의 유해를 직접 보고 오셨습니다. 감회가 누구보다 남다를 것 같은데요.
[레이 카폰] 지금도 그 감정을 잘 묘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었고, 형제들도 고작 한 두 살로 어렸기 때문에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제 부모님께 들은 얘기 외에는 삼촌을 개인적으로는 알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젠 저도 64살인데요. 삼촌에 대한 수많은 얘기를 보고 들으며 마침내 삼촌을 만난 건 매우 흥분되는 행복한 기분이라 할까요. 무엇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처럼 이제는 카폰 신부가 정말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됐으니 말이죠.
저는 먼저 카폰 신부의 유해 확인에 많은 노력을 쏟으신 미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관계자분들께 재차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큰 일을 하시는 분들이고, 또 고된 일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실종자확인국에 계신 분들은 이번 방문에서도 저희에게 많은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저희만을 위해 시설 전체를 안내해 주셨고, 유해 감식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저희를 삼촌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방에 데려간 후 자리를 비켜 주길 원하냐고 물었고, 덕분에 저희는 처음으로 카폰 신부와 30-40분 정도의 시간을 한 공간에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확인하고자 하는 유해들에 보인 존중과 사랑은 경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저희 삼촌 카폰 신부를 비롯해 많은 전사자들의 유해를 가족의 품에 되돌리기 위해 쏟는 그분들의 노력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자: 유해가 행방불명이었던 지난 70년이란 긴 세월은 유족들에게 견디기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레이 카폰] 말씀하신 70년이란 아주 긴 세월 동안 카폰 신부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수많은 엇갈린 주장들이 오갔습니다. 삼촌의 유해만 어딘가에 따로 묻혀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다른 유해들과 이미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그래서 실제로 삼촌의 유해를 끝내 볼 수 있을지에 대한 희망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특히 저희 할머니는 한 번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삼촌이 결국은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삼촌의 사망소식이 절대 사실이 아니고 결국은 집에 돌아오게 될 거라고요. 나중에 할머니는 삼촌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에도 삼촌의 유해가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계속 기도하셨습니다.
기자: 앞서 RFA에, 카폰 신부 가족들의 몇 가지 개인적인 유품들도 가져가 유해 곁에 두고 올 예정이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유품을 가져 가셨나요?
[레이 카폰] 네, 먼저 할머니께서 갖고 계시던 묵주(rosary)를 두고 왔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마다 수 차례 묵주를 손에 쥐고 아들이 무사히 집에 돌아오길 기도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기도하실 때 쓰시던 회중시계(pocket watch)도 가져 갔습니다. 작동이 멈춘 지 오래된 시계였지만 할아버지는 끝까지 그 시계를 손에 쥐고 아들의 유해가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길 빌었습니다. 너무 많이 문질러서 제가 시계를 전해 받았을 땐 원래 뒷면에 새겨져 있던 글씨와 무늬들은 다 사라지고 매끈한 표면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2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지급받았던 인식표(dog-tag)도 삼촌 곁에 두고 왔습니다. 두 분 다 2차 세계대전을 참전하신 분들이었으니까요. 9월 말 유해가 고향 캔자스주로 돌아올 예정이지만, 그 사이에도 가족이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에 가족들의 유품을 먼저 삼촌 곁에 두고 왔습니다.
필센(카폰 신부 고향)에 사는 한 지인분은 과거 할머니 할아버지가 카폰 신부와 함께 살았던 주택에 직접 찾아가 그 곳에 있는 흙을 담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또 카폰 신부와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했던 참전용사 중 한 분도 카폰 신부는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라며, 그가 평생 아껴온 유품을 제게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분들이 주신 유품들도 함께 두고 왔습니다.

기자: 하와이 펀치볼 국립 태평양 기념묘지에서 '로제트 기념식(The Rosette Ceremony)'에도 참여하셨다고요. 유해의 신분이 확인되면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알고 있는데요. 어떘나요?
[레이 카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로제트 기념식은 앞서부터 펀치볼 묘지에서 거행돼 왔는데요. 묘지 주변에는 다양한 전쟁과 그 속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상징하는 석판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유해가 확인되면, 그들의 이름 옆에 장미 모양의 검정핀을 놓는데요. 저도 이번에 카폰 신부의 이름 옆에 핀을 꽂고 왔습니다. 석판에 쓰여진 카폰 신부의 이름은 금색으로 따로 칠해져 있었는데 이는 명예훈장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2013년에 그 곳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제가 놀랐던 점은 쓰여진 이름의 수에 비해 벽에 실제 놓인 '로제트 핀'의 수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핀들이 놓인 걸 봤습니다. 이같은 핀 하나하나가 유해를 가족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일하는 고마운 분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길, 더 많은 핀들이 저 이름들 옆에 놓이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기자: 올 가을 고향 캔자스주에서 치러질 예정인 에밀 카폰 신부의 공식 장례 일정은 어떻게 준비돼 가고 있나요?
[레이 카폰]. 9월 24일에는 하와이에서 유해를 모시고 와 캔자스주 위치타에 내린 후 곧 바로 고향인 필센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귀향의 기쁨을 오랜 시간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고향 주민 분들과 함께 먼저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분들과 함께하는 추모 미사 등 몇가지 일정을 며칠 동안 진행한 후, 29일에는 예정대로 공식 장례를 치를 예정입니다. 장례 이후에는 카폰 신부의 유해는 위치토 교구 성당 지하실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북한' 하면 드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레이 카폰: 저는 앞서부터 삼촌과 같이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했던 아직 살아계신 참전용사분들과 연락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래서 포로수용소에서 당시 그 분들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익히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제가 매번 되새기는 것은 삼촌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오히려 자신을 잡은 자들이 용서받기를 신께 빌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저들을 용서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물론 북한 정권이 어떤 정권이다라는 데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을테지만, 어려운 질문인것 같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밝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자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카폰 신부가 그랬듯이 말이죠. 저 역시도 그런 삼촌의 발자취를 따라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제가 할 수 없는 것들, 또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며 휘둘리지 않는 길을 걸어 나갔으면 합니다.
기자: 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성인'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 카폰 씨와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