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북, 고난의행군 재선언 ⑤“죽음의 행군 또 하자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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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과거 '고난의 행군'을 직접 경험한 탈북민들에게는 당시의 비극이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친구, 이웃 등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데요. 김정은 총비서가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선언했을 때 탈북민들은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고난의 행군'을 다시 선언한 북한의 현 상황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는데요. 오늘은 마지막 순서로 탈북민들의 아픈 기억을 노정민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무기력하게 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고난의 행군"

[정진화 씨] 고난의 행군 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직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생사람이 굶어 죽은 거예요. 충족하지는 않았지만, 일정량의 쌀도 주고, 학교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던 평범했던 생활이 어느 날 갑자기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에서 시작되면서 그냥 쓰러져 버린 거잖아요. 대참사죠.

1990년대 중∙후반, 함경남도 함흥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을 보냈던 탈북민 정진화 씨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너무나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정 씨가 살았던 함흥시는 산업단지여서 주변에 공장밖에 없었고, 시내에 살던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굶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숨지는 사람이 늘어났는데, 한두 명이 아닌 하루에도 수백 명씩 아사자가 발생하다 보니 시신을 묻을 땅조차 없어 한 구덩이에 수십 명씩 매장했습니다.

정 씨는 가족과 주변 이웃이 죽어갈 때마다 많이 울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음에는 내 순서가 되겠지'라며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바로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는 게 정 씨의 설명입니다.

[정진화 씨]그 당시에는 할 수 있는 것이 굶는 것밖에 없었어요. 하도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까 그전에는 등을 떠밀어도 가지 않던 농촌에 스스로 가서 나뭇잎과 풀, 잎사귀를 뜯어 먹는데, 땅에서 조금씩 싹이 올라올 때는 뿌리부터 뽑아 먹는 겁니다. 그렇게 1~2년이 지나니까 아예 들판에서 풀이 돋질 않는 겁니다. 길을 가면 앞에서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정 씨에게 고난의 행군이란 말은 죽음의 행군과 같은 뜻입니다. 북한에서 열차 방송원으로 일하면서 전국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 씨에게 고난의 행군은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고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진화 씨] 아침에 일어나면 인민반에서 '누구 아들이 죽었다', '누구 남편이 죽었다' 등 죽었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또 역전에 가도 죽음, 동네에 가도 죽음, 저는 정말 죽음을 많이 봤어요.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저는 '죽음'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김정은 총비서가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라고 했을 때 정말 욕이 나왔어요.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책임이 있어야 하고, 어버이라고 했으면 자신을 바라보는 국민들에게 최소한 먹을 것을 보장해줘야 하는데,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함경북도 청진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었던 탈북 인권운동가 박지현 징검다리 대표도 고난의 행군 당시 자신을 아껴준 큰아버지가 눈앞에서 죽어간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또 1998년, 자신이 북한을 떠날 때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아버지 생각만 하면 지금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박지현 대표] 저는 큰아버지가 제 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직접 봤거든요. 큰아버지가 제 앞에서 굶어 죽는 것을 본 것도 트라우마로 남아있지만, 특히 저희 아버지는 제가 마지막으로 떠날 때 사실 숨만 쉬고 계셨지, 거의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혓바닥이 다 트고, 벌레가 기어 다니고, 숨만 겨우 쉬셨는데,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버티신 이유는 저희가 떠나는 것을 보시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다른 것은 기억이 안 나도 20년 전 그 아버지 모습만 아직도 남아있는 거죠.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나거든요.

북한 양강도가 고향인 무역일꾼 출신 김혜영 씨도 고난의 행군이란 말에 깊은 한숨부터 나옵니다. 그 당시에 본 참혹한 시신들의 모습은 지금도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혜영 씨] 아~~ 고난의 행군. 그 당시에는 숱한 꽃제비들이 나오고, 나무껍질 먹고, 풀뿌리를 캐다 못해 나중에는 이마저도 없어 깊은 산속에서 풀을 잘못 뜯어 먹다 죽은 사람도 많고요. 전쟁 시기도 아닌데, 시신들이 시커멓게...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밖에 모르고, 도둑이 많아지고, 범죄도 많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 머리끝이 올라가요.

탈북민 사회에서는 최근 김정은 총비서가 선언한 고난의 행군이란 말에 또 북한에서 사망자가 급증하지 않겠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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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이 트라우마로 남은 이유

당시 길거리와 역전은 물론 집마다 수많은 사망자를 목격했던 탈북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이 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가족, 친구, 이웃이 눈앞에서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박지현 대표] 저희 같은 경우는 가족들이 굶어 죽는 것을 직접 눈앞에서 봤잖아요. 길거리, 역전, 버스 역 등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우리가 봤거든요. 내 가족, 나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 옆집 사람 등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죽었잖아요. 그 트라우마가 남았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 '또 사람들이 굶어 죽겠구나'라며 그때 생각을 떠올리는 거죠. 평생, 이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요.

탈북민들이 당시 고난의 행군에 분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백만 명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북한 당국의 태도입니다. 오히려 살길을 찾아 나섰던 주민들을 처벌하고 단속하면서 수많은 탈북민들과 사망자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정진화 씨]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보니까 모든 재산이 지도자의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당시 배가 고파서 어디에 가서 손을 대면 나라의 재산에 돈을 댔다면서 공개 처형하고, 시범적으로 총살하고, 중국에 친척이 있어 돈 벌어오겠다며 두만강이나 압록강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돈을 벌어 돌아올 때면, 갈 때는 마음대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북한 당국이 허용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수많은 탈북민들이 생겼고, 두만강이나 압록강에서 채 넘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있고,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사람들도 엄청 많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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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총비서가 다시 고난의 행군을 언급할 만큼 오늘날 북한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우려 속에도 북한 당국이 뚜렷한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시장 활동과 탈북민 송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어 북한에 가족이 있는 탈북민들의 마음은 타들어 갑니다.

[김혜영 씨]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가족이 저렇게 한쪽에서 죽어간다는 것을 보면서도 도와주지도 못하고, 도와주게끔 하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들이 못 도와줄 때 혈육이라도 도와주도록 하면 경제가 돌아가고 국민이 잘살면 좋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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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은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고 싶은 분노와 두려움의 단어입니다. 고난의 행군은 사랑하는 내 가족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진화 씨] 너무 싫어요. 다른 말로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전 세계가 다 힘든데,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해도 그럴 텐데, 노골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언급한 것은 '너희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과 똑같아요.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눈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죽음의 행군'이었어요. 그 단어를 다시 꺼내서 사람들에게 공포를 준다는 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탈북민들은 당시의 아픔을 겪었던 북한 주민들이 두 번 다시 같은 비극으로 가족을 잃고 싶지 않기에 북한 당국의 통제와 단속에 맞서 더 강인한 생명력으로 지금의 힘든 시기를 이겨낼 것이란 희망과 기대도 걸고 있습니다.

[박지현 대표] 저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사회적 체계 때문에 말을 못 했지만, 더는 가족들을 눈앞에서 잃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더는 가족을 잃고 싶은 않은 북한 주민들이기 때문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