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해안에서 잇달아 발견된 북한의 고기잡이 어선. 많은 사람들이 이 배를 '유령선'이라 부릅니다. 오직 돈벌이를 위해 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작은 목선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에 뛰어든 북한 어부들은 거친 바다와 싸우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몸과 목선이 하나가 돼 바다를 떠돌게 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일본 현지에서 집중 취재한 북한의 소형 고기잡이 어선의 표류 문제와 실상을 두 차례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특별 기획: 항구로 귀환하지 못한 채 떠도는 북한 유령선'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조업 중 풍랑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을 오간 뒤 탈북을 결심한 북한 어부의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보도에 박정우 기자입니다.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로 나서는 어부에겐 항상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만선을 고대하는 어부의 부푼 기대는 쉽게 그 품을 열지 않는 바다 앞에서 파도처럼 부서지기 일쑤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나와 있는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인근 해안의 오늘 날씨처럼 거친 파도와 바람이 한데 뒤엉키면 바다는 어부에겐 공포 그 자체입니다.
"오징어철 두 달 조업하면 일 년치 식량 해결"
"한 해 폭풍 두 번 만나 가까스로 돌아오기도"
지난 2004년 여름 북한 함경도 동해안의 한 항구. 김철민(가명∙당시 38세)씨 역시 육지를 떠나올 때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아 손에 쥘 목돈을 생각하며 힘든 것도 잊고 저녁녘에 작은 목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김철민: 그 쪽 생활에서 한 해 오징어(북한에선 낚지) 철에 일 년치 식량을 해결한다, 이런 말이 있거든요. 그건 사실이고. 두 달 오징어 철 중에 날씨가 좋은 한 달을 계속 나간다면 말이죠.
하지만 만선의 기쁨도 잠시. 오징어 떼를 좇아 바다로 나간 김 씨는 갑자기 배를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김철민: 초저녁 작업 떠났을 때는 바람도 없었고 파도도 잔잔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새벽에 비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어요.
비바람은 금세 작은 목선을 집어 삼킬 듯 거세졌습니다.
김철민: 작은 목선이 파도에 휘말릴 때는 우선 좌우가 보이질 않아요. 파도의 높이가 엄청 높아서 몇 층 아파트 높이로 하늘만 약간 보일 정도로. 그럴 때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눈을 감고 그냥 맡기는 거지요. 요행히 뒤집어 지지 않으면 다시 파도를 타고 올라 왔다가 다시 내려갔다가,….

그 해 여름에만 두 차례 폭풍을 만난 김 씨는 운 좋게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김철민: 두 번 풍랑을 만나고 보니까 더 이상 용기가 안 나더라구요. 제일 먼저 아이 생각이 나고 그 다음 아내 생각이 나고.
그 해 결국 더 이상 오징어잡이 배에 오르지 않았던 김 씨는 이듬해 탈북한 뒤 가족과 함께 일본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과 만난 김 씨는 지난해 말부터 일본 연안에 북한 유령선 출현이 급증한 데 대해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김철민: 해마다 오징어잡이 기간에는 인근 지역에서만 몇 십 명은 돌아오지 못하는 건 반복돼온 사실이고,….
"장비 없이 고기 좇아 먼 바다 나가기 일쑤"
"10년 전이나 배 크기∙장비 변함없어 놀라"
북한의 소형 고기잡이 배 대부분에는 항해에 필요한 기본 장비조차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김철민: 자그마한 목선에 한 대여섯 명 타는 데 (다른 장비 없이) 나침반 하나 갖고 나가다 보니까 우선 방향을,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자체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나침반에만 의지해서 나가는 데 나침반은 거리를 모르거든요. 어디로 가고 있는지만 알지 내가 어디로 나와 있는지 (모르는 거죠).
하지만 고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먼 바다로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김철민: 그러니까 오징어를 쫓아서 가다 보면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올 때가 많고 대체로 엔진을 배 용량에 맞는 걸 사용하지 못하고 약한 걸 사용하다 보니까 바람이 많이 불거나 하면 엔진이 있으나 마나 한, 역할을 크게 못하고.
그는 파도에 떠밀려온 목선을 언론 보도를 통해 자세히 살펴봤다며 10년 전과 배 크기나 장비가 거의 변함이 없어 놀랐다고 털어놨습니다.
김철민: 제가 배를 보니까 10년 전과 장비나 배 크기가 전혀 (변함없이) 똑 같구요, 배 척 수가 아주 증가한 것 같아요.
대부분 빈 배 또는 죽은 선원 발견 '유령선'
일부 생존자 발견돼 북한으로 돌아 가기도
일본 해안에 떠밀려 온 북한 목선은 지난 한 해에만 모두 104척에 이릅니다. 대부분 파손된 빈 배만 발견되거나 죽은 선원이 함께 발견돼 '유령선(ghost ship)'으로 불립니다. 반면 아주 드물긴 하지만 생존자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경찰청 경비국 외사정보부 이시구로 유이치 경시는 지난 해 11월 아키타와 홋카이도에 잇따라 떠내려온 북한 목선에서는 생존 어부 18명이 발견됐다고 RFA,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이시구로 유이치: 아키타 해안에서 생존자 8명을 발견했습니다. 유관기관 간 협조 아래 이들을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어부로 항해도중 어려움에 처했고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이시구로 경시가 밝힌 대로 지난 해 11월23일 일본 아키다현 유리혼조시 해안에서 표류중 발견된 북한 어부 8명은 한 달 뒤인 12월 26일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반면 11월 29일 일본 홋카이도 남부 마쓰마에코지마섬에서 발견된 북한 선원 10명 중 일부는 구조된 뒤 경찰 조사 과정에서 물건을 훔친 것으로 드러나 처벌을 받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시구로 유이치: 당시 현지 경찰의 순찰 도중 섬에서 북한 선원들이 발견됐고 이후 이들이 타고 온 목선도 발견됐습니다. 이 후 선장과 선원 2명이 절도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 기소 절차가 진행 중이고 다른 선원 일부도 추가 혐의가 드러나 처벌 절차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는 일부 해안가 주민들이 이번 사건으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면서 경찰 당국이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 목선이 해안가로 대거 떠밀려 오면서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고민도 커졌습니다. 폐선 처리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시카와현 시카정 환경안전과 시오타니 야수노리 주사는 해안가에 방치된 북한 목선을 빨리 치우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시오타니 야수노리: 목선을 치우라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해안가는 이시카와 현청 소관이어서 저희로선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시오타니 주사는 지난 해 11월 이후 시카정 해안가로 떠밀려온 북한 목선이 12척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시오타니 야수노리: 이시카와현 관내에서는 가장 많은 목선이 시카정에서 발견됐습니다. 그 전 해에는 단 한 척의 북한 목선도 떠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련 동포들, 안타깝고 착잡한 심정
"좀 어지간히 해라" 북한 탓 맘 고생 심해
이처럼 최근 들어 북한 목선이 잇따라 일본 해안으로 밀려들면서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 특히 북한과 가까운 재일조선인총연합(조선총련) 출신 재일동포들의 마음은 착잡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친척 중 일부가 여전히 북한에 살고 있는 김선민(가명) 씨는 이런 상황에 내몰린 북한 어민들의 처지가 불쌍하지만 일본에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더 강해지면서 복잡한 심경입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또 왔구나 뭐 이런 식의 반응, 물론 처음엔 불쌍하다, 여기까지 와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북한 때문에 우리가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재일동포가 많지요.
김 씨는 지난해 연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이어 유령선 출몰까지 이어졌다며 두 사안이 묘하게 연관돼 있는 느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또 핵실험 하냐, 뭐 그런 거 하고 같은 반응이죠. 어지간히 해 달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일부 일본 언론과 정치인들이 북한에 대한 공포심과 적대감을 키우고 있는 데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냈습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한편으로는 일본 언론의 보도는 너무 하다, 그래서 공작원 아닌데도 일부러 공작선이라든지 이렇게 딱지를 딱 붙여 놓고 공포감만 심어놓는 것에 대해서는 화가 납니다.
다만 일부 북한 선원들이 절도 행위에 가담한 건 못내 아쉽다는 반응입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다만 우리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도둑질하거나 하면 창피하고, 뭘 할려고 했는지, 북한에 가져가서 팔려고 했는지, 자기들 쓰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북한 당국 책임도 커…좋은 배 마련해줘야”
"평창 간 만경봉호 어민들에게 주면 안 되나"
김 씨는 북한 선원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겨선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선원들이 이런 처지로 내몰린 데는 북한 당국의 책임이 크다는 겁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1차적으로 이해는 되죠. 여기까지 와야 생활할 수 있는 거.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지 않더라도 생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나라가 그걸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
그는 북한 당국이 어민들에게 작고 낡은 목선이 아니라 크고 좋은 배를 마련해 주면서 어업을 독려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먼 바다에 조업하러 올 수는 있죠, 그렇다면 국가가 좋은 배를 마련해 준다든가, 그런 목조선 말고. 큰 배를 마련해 줘서 거기에 100명 이나 200명씩 태우고 가면 좋은 거잖아요.
김 씨는 북한 당국이 지난달 폐막한 한국의 평창동계올림픽 때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이 타고 온 만경봉호를 예술단이 아니라 어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김선민: (음성변조)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면 좋고 아니면 멀리서 조업해야 한다면 좋은 배를 마련해 주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만경봉호라도 좋지 않았을까?
부자 되려는 욕심에 위험 무릅쓰고 조업나서
돈 벌 기회 많지 않은 북 상황 '유령선' 양산
'유령선' 북한 목선은 왜 계속 떠밀려 올까? 일본 내 손꼽히는 한반도 문제 권위자인 이즈미 하지메 도쿄국제대학 국제전략연구소 교수는 역설적으로 북한에 일부 도입되고 있는 시장경제 요소를 유령선 출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습니다.
이즈미 하지메: 역시 시장경제가 제일 큰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내부의 통제가 많이 완화된 측면이 있고, ….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바다로 나가게 된 배경에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즈미 하지메: 예전에는 위에서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자발적으로 (바다에) 나가서 (조업이) 잘 되면 부자가 되는 구나, 이런 인센티브, 유인책이 생기면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죠.
북한 전문 매체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도 돈벌이가 되니까 무리해서 바다에 나가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돈을 벌 기회가 많지 않은 현재의 북한 상황이 '유령선'을 양산하는 구조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사실 북한 내부에서 일반 서민이 어느 정도의 현금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습니다. 오징어잡이는 보름정도 조업을 하면 많게는 중국 돈으로 2천원(약 316달러)에서 3천원(474달러) 정도 개인 분배가 있습니다.
현금수입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사고 위험을 잘 알면서도 무리해서 바다로 나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이시마루 대표는 덧붙였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북한 동해 연안에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가정,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많아 과부촌이 많다고들 합니다.
돈을 좇아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왔다 결국 '유령선'으로 떠도는 북한 목선들은 올 해 들어서도 계속 일본 해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해류와 북서풍의 영향으로 겨울철 한반도 지역에서 부유물이 자주 떠밀려 오는 이시카와현 시카정 해안의 경우 2018년 1, 2월 두 달 동안 이미 6척의 북한 목선이 발견됐습니다. 북한과 일본을 가로지르는 바다 위를 떠돌던 이 '유령선' 역시 한 때는 만선의 부푼 꿈을 가진 북한 어부를 태웠던 작은 고깃배였습니다.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정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