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미 해병대 소속으로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애초 한국에서 경주마였지만, 전쟁 발발 이후 미 해병대에 입대해 전투 과정에서 탄약과 부상자 운송이라는 임무를 수행한 군마가 있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임무를 끝까지 완수했다고 해서 이름도 '레클리스,' 즉 '무모하리만치 용감한'이었는데요. 지금은 미국에서 더 유명한 전쟁영웅이 된 한국 경주마를 노정민 기자가 소개해드립니다.
경주마에서 군마로, 미 해병대에 입대한 '아침해'
최근(6월 10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찾은, 미국 워싱턴 DC 인근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미 해병대 박물관.
이곳에는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대의 역사와 발자취가 기록돼 있습니다. 박물관의 야외 전시관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우뚝 서 있는 실물 크기의 말 동상 하나가 눈길을 끕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왜소한 체구인데, 등에는 포탄을 메고 산을 오르는 형상입니다.
이 말이 바로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무반동화기소대 소속으로 6.25 한국 전쟁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군마 '아침해'입니다.
[현장음] 이 말의 이름은 '아침해'입니다. 그렇게 큰 체구도 아니었고, 작은 말이었습니다.
기자 일행을 안내한 그웬 아담스 미 해병대 박물관 공보국장에 따르면 1948년 제주에서 태어난 '아침해'는 애초 남한에서 경주마로 활동한 암말이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아침해'를 키우던 한국인 주인 김혁문 씨는 당시 지뢰 사고로 다리를 잃은 여동생의 의족을 마련하기 위해 말을 팔기로 했고, 때마침, 전투에서 탄약과 군수용품 등을 운반할 말을 찾고 있던 미 해병대는 '아침해'를 당시 250달러에 구매합니다.
[그웬 아담스 공보관] 6.25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원들은 스스로 포탄 탄약을 산 정상까지 운반해야 했죠. 그래서 당시 에릭 페터슨 중위가 대신 탄약을 운반할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침해'를 사게 됩니다. 물론 '아침해'의 주인은 말을 팔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 사고로 다리를 잃은 여동생의 의족을 마련하기 위해 이 말을 넘겨주게 되죠. 그렇게 미 해병대에 입대한 '아침해'는 처음에 겁을 먹은 듯 보였지만, 곧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산 정상까지 탄약을 운반하고, 내려올 때는 부상자를 산 아래로 이송했죠. '아침해'는 단순한 말이 아닌 미 해병대였습니다.
개 당 약 10kg에 달하는 탄약을 한꺼번에 2~3개씩 운반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미 해병대원에게 '아침해'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아침해'는 등에 4개의 탄약통을 메고 산 아래부터 정상까지 오르내렸습니다. 전투가 치열할 때에는 한 번에 8개, 무게만 100kg이 넘는 탄약통을 실어나르곤 했는데, 총탄이 빗발치고 자칫 탄약이 폭발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아침해'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이 밖에도 부상자 이송은 물론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때는 통신선 설치와 군수용품 운송 등도 척척 해내면서 부대의 전투력 향상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미 해병대원들은 군마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아침해'에게 '레클리스,' 즉 '무모하다'는 뜻의 새로운 이름까지 지어주게 됩니다.
기자: '레클리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 궁금한데요?
[그웬 아담스 공보국장] '아침해'가 전쟁 중에도 두려움 없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모하게 보일 만큼 용감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레클리스'는 미 해병대원들 사이에서 단순히 탄약과 군수용품을 실어 나르는 '군마'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목숨을 걸며 싸우고, 식사 때나 휴식 중에는 병사들과 같이 샌드위치와 베이컨, 맥주 등도 즐겨 먹는 '전우'와 다름없었습니다.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26일. 당시 미 해병대의 전초 기지를 침공한 중공군을 격퇴하는 네바다 전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 해병대가 참전한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도 '레클리스'는 온갖 위험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그웬 아담스 공보국장] 5일 동안 이어진 그 전투에서 하루 동안 산 정상을 51번이나 오르내리면서 4톤에 달하는 탄약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루 동안에 4톤을 말이죠. 탄약을 싣고 산 정상에 올라간 뒤 내려올 때는 부상자들을 데리고 내려와 부상 병동까지 옮겼습니다. 그날 사용한 포탄의 95%를 혼자 옮겼는데, 누구의 인도 없이 자기 스스로 산 아래에서 포탄을 싣고 정상까지 옮겼다가 다시 내려와 싣고 가고, 그렇게 반복했던 거죠. '레클리스'는 매우 신속하게 움직였고, 해병대원들이 필요한 것을 보급해줬습니다.
매우 치열한 전투였지만, '레클리스'의 활약 덕분에 미 해병대는 전초 기지를 확보하고 중공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당시 한 참전 용사는 "'레클리스'가 말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에 모두가 감동했고, 이는 적을 물리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 '레클리스'는 미 해병대와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195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오게 됩니다. 이미 미 해병대 소속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에 오는 것이 맞다는 게 아담스 공보국장의 설명입니다.
[그웬 아담스 공보국장] 미 해병대는 아무도 남겨 두지 않는 것이 전통입니다. 해병대원이라면 그가 부상을 입었든, 전사했든 끝까지 미국에 데려오는 것이 임무입니다. '레클레스'는 미 해병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와 함께 돌아온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고 끝까지 임무를 완수한 '레클리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하사로 진급하게 됩니다. 이후 퇴역군인 자격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레클리스'는 1959년에 성대한 전역식을 치르며 은퇴하게 됩니다.
또 전쟁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2개의 퍼플하트 훈장을 비롯해 미 대통령 표창, 미 국방부 종군기장, 한국 대통령 표창, 유엔 종군기장 등을 받았고, 1968년에 '레클리스'가 사망하자 미 해병대는 성대한 군 장례식과 함께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미국의 시사 월간지인 라이프(LIFE) 특별호에서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험 링컨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미국을 빛낸 100명의 영웅에도 꼽히게 됩니다.

잠시 잊혀진 '레클리스', 다시 우리 기억 속에
이처럼 6.25 한국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미국을 빛낸 100명의 영웅에도 선정됐지만, '레클리스'는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국인 여성 작가에 의해 세상에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미국에서 '레클리스'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 로빈 허튼 씨는 우연히 이 말에 대한 짧은 글을 읽는 순간 큰 감동을 받았고, 세상이 '레클리스'를 다시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갖게 됐다고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로빈 허튼] 우연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집필을 하던 중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영감을 얻기 위해서 책장에 있는 책 하나를 꺼내 들었죠. 그 책의 등장인물 중에 말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레클리스'가 6.25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세 단락의 짧은 글을 읽게 된 겁니다. 저는 이 말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궁금했고, 그때부터 이 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허튼 씨가 당시 '레클리스'와 함께 참전했던 해병대원들을 만나고 자료 수집과 연구를 하는 데만 7년의 세월이 걸렸고, 책 출판까지는 (SGT. RECKLESS; America's War Horse) 1년이 더 소요됐습니다. 하지만 '레클리스'를 깊이 알아갈수록 역사 속에서 잊혀서는 안 된다는 확신은 더 강해졌습니다.
[로빈 허튼] 이 말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을 때 정말 놀라웠습니다. 내가 알게 된 말 중 단연코 최고의 말이라 생각했고, 그녀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레클리스'에 관한 조사를 하면서 참전용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레클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이었다고 할 때마다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레클리스'가 정말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고 믿고 있었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레클리스'에 관한 책이 계속 출간된 데 이어 미국 TV에도 그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서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도 얻게 됩니다. 이후 허튼 작가는 '레클리스'의 공로를 기리는 기념비 건립 사업에 나섰고, 이미 미국 내에서만 5개가 세워진 데 이어, 6번째 기념비도 곧 건립될 예정입니다.
[로빈 허튼] 저에게 '레클리스'는 선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영웅에 대해 배우는 것을 매우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레클리스'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그녀를 다시 잊지 않게 하기 위한 멋진 방법이었고, 제가 쓴 책도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미 해병대 군마인 '레클리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도 미 해병대 박물관 전시관에는 '레클리스' 동상을 통해 6.25 한국전쟁의 역사를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당시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듯 한국에서 미 해병대에 입대해 묵묵히 임무를 완수했던 '레클리스'의 희생을 기억하고 평가해주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입니다.
[그웬 로빈슨 공보국장] 저도 해병대를 전역했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을 때 미 해병대가 참전한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에 대해 배웁니다. 당시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병사들, 해병들, 심지어 말이든 우리가 했던 일들이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