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영웅 웨버 대령, 마지막까지 한국에 애정”
2022.05.08
앵커: 한국전쟁에 참전해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은 뒤 한국전을 미국 내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친 윌리엄 웨버 미 예비역 대령이 최근 별세했습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물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유가족에 조전을 보내 한미동맹의 상징, 웨버 대령을 추모했습니다,
RFA 취재진이 지난달 22일 열린 웨버 대령의 주모식장에서 부인 에널리 웨버 여사로부터 그의 삶을 들어봤습니다. 박수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전 자유를 위해 싸운 영웅’ 윌리엄 웨버 대령
한국전 참전용사 윌리엄 웨버 예비역 대령의 추모식이 최근 (4월22일) 그의 고향 메릴랜드에서 열렸습니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작 당시 초대 이사장이었던 웨버 대령은 미국에서 잊혀져 가던 한국전쟁과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전 발발 당시 미 육군 소위였던 그는 187 공수연대 전투단 소속 대위로 한국에 파병돼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평양 점령 등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 수류탄에 맞아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었고, 부산과 일본을 거쳐 미국 본토로 후송됐습니다.
웨버 대령은 1980년에 전역한 후에도 한국전쟁과 남북한에 대한 애정을 갖고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재단 회장을 맡아 6.25 전쟁을 미국에 알리는데 헌신했습니다. 웨버 대령은 생전 교과서에 한국전쟁은 많아야 ‘다섯 문단’으로 적혀있다며 ‘다섯 문단 전쟁’으로 부른 바 있습니다.
RFA 취재진은 웨버 대령의 추모식에서 그의 아내 에널리 웨버 여사를 만나 한국전 참전용사 웨버 대령의 마지막 발자취를 짚어봤습니다.
“웨버 대령, 생전 한국전 잊히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
<기자>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윌리엄 웨버 대령은 살아생전에 한국전쟁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봉사하셨는데, 혹시 그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지요?
[에널리 웨버]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굉장히 많아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재단 이사회에 참가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그리고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 건립 자문위원으로 지명됐을 때 그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어떻게 만들지 구상하고 작업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는 일을 하게 되어 정말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념비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건 한국인들이었습니다. 미국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한국인들, 그들의 아버지, 또 할아버지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남편은 베트남전에도 참전했기 때문에 베트남 기념비가 세워졌을 때도 자랑스러워했어요. 다만 당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의 기념비가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듯했어요. 윌리엄은 베트남 전쟁 기념비가 세워지자, 한국 전쟁 기념비가 세워져야 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한국전쟁은 미국에서 잊혀져 가곤 했어요. 그는 한국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가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미 의회에서 일하던 당시 출근길에 그 거리를 운전할 때마다, 그 기념비는 제 마음속에 어떤 울림을 주었어요.
한국에 깊은 애정 웨버 대령 “유일한 유감은 남북 분단”
<기자> 웨버 대령이 한국전 이후 한국을 방문하셨다고요?
[에널리 웨버] 2017년 윌리엄은 그가 부상당했던 언덕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언덕을 올라가려 했지만, 덤불 때문에 그러진 못했어요. 한국 전쟁 이후 그 언덕의 나무들은 필요에 의해 베였고 언덕은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죠. 그나마 언덕 아래에는 절이 있었는데, 윌리엄은 전쟁 중에는 절이 거기 있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 절을 관리하던 사람이 우리에게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군요. 윌리엄의 임무는 그 고지를 지키는 것이었고, 전쟁 중에 부상을 입고 수송되던 상황에 그는 산 아래까지는 보지 못했던 거였어요. 그는 자랑스럽게 “부상을 입어 후송될 때까지 계속 싸웠다”고 말했어요. 또 당시 너무 추워서 흐르는 피가 딱딱하게 굳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팔을 다쳤을 때보다 다리를 잃었을 때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면서, 그의 동료들은 그를 일본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했고, 남편은 결국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겪은 모든 사고들을 생각하면 목숨이 9개였던 것 같죠.
<기자> 웨버 대령은 어떤 분이셨고, 또 한국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요?
[에널리 웨버] 우리는 49년간 결혼생활을 했고, 모든 일을 함께했습니다. 한국에서 말하는 “같이 갑시다 (Katchi Kapshida)”라는 구호처럼요. 그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윌리엄은 그가 한 일에 대해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마음속으로 옳은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적으로 그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같이했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남북한이 아직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본인의 살아생전이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 남북한이 통일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는 남북통일의 큰 지지자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한국의 젊은 사람들은 통일하게 되면 비용도 많이 들고 한국 사회가 불안정해지리라 믿기 때문에 통일에 찬성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는 “남북한에는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이 아직 있고 그들이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그의 생각에 여지없이 동의했습니다. 윌리엄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기자> 웨버 대령이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에널리 웨버] 윌리엄은 진심으로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원해왔어요. 특히 북한에 조부모가 있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했어요. 그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꼭 통일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저와 그처럼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통일을 원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것을 위해 싸웠습니다. 한국은 전쟁 이후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사회를 잘 구축했고, 윌리엄과 저는 그런 한국을 정말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어요.
독일 분단 겪어 통일의 어려움 알지만, 분단의 아픔도 헤아려야
<기자> 마지막으로 현재 남북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에널리 웨버]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됐었던 당시 독일에 살았던 저는 극도로 가난했습니다. 집이 여러 번 폭격당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아버지가 전쟁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와 저는 남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저는 아버지를 뵙지도 못했고요. 독일은 오랜 세월 동안 분단되어 있었고, 우리는 동독이 서독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동독을 되살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남한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서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그들은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제게 한국전쟁 당시 다리를 폭파해 북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올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전 남편에게 한강에 다리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고 했어요. 그는 가족과 헤어졌던 피난민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기자> 네,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에널리 웨버 여사로부터 한국전 참전용사이자 한국전쟁을 미국에 알리는데 헌신한 윌리엄 웨버 대령의 삶에 관해 들어봤습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