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특집: 탈북 국군포로 인터뷰] “전쟁 다시는 없어야”

워싱턴-천소람 cheons@rfa.org
2022.06.25
[6.25특집: 탈북 국군포로 인터뷰] “전쟁 다시는 없어야” 6.25 국가유공자 모자를 쓰고 있는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어르신.
/RFA Photo

앵커: 72년 전인 19506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으로 참전했지만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북한으로 끌려간 당시 열아홉 살의 청년. 13년의 수용소 생활과 강제노동 속에서도 5차례의 탈북 시도 끝에 20016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씨의 기나긴 여정, 천소람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김성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라는 참상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6 25일은 휴일이었는데, 다 휴가 나가고 모내기 철이었거든요. 군대들이 (모내기에) 협조하기 위해 논에 나가 일도 하고 있는데, 6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폭풍과 같이 남침을 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외출도 나가고, 휴가도 나가고 준비도 없이 있는 상황에서 남한을 침공해서, 서울이 3일 만에 뺏겼습니다.

 

1950625. 당시 19살의 청년 김성태 씨가 회상하는 6.25 한국전쟁은 혼란스럽습니다.

 

[김성태] 나는 6 25일 본 부대에 있었는데, 9시쯤 되니까 38선 일대에서 천둥소리가 나는 거에요. ‘꽝, 꽝’. 이것이 포 쏘는 소리인 줄 모르고…. 평화시대니까.

 

천둥소리인 줄로만 알았던 굉음은 전쟁 발발을 알리는 포 소리였습니다.

 

[김성태] 아침 9시쯤 되니까 방송을 통해서 외출 나갔던 장병들, 군인들 빨리 자신의 소속 부대로 귀가하라고 했어요. 다시 무기를 손에 들고, 전선에 나가서 싸웠는데, 준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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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에서 한 방문자가 우산을 쓰고 눈을 피하며 걸어가고 있다. /Reuters

 

굵은 소나기가 떨어지는 그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성태] 나는 하사관 학교에 가서 오후 5시에 출동했어요. 갑자기 38선에서 먹구름이 떠가지고 대추 알 같은 소나기가 떨어졌어요. 지금은 다 포장도로고, 차가 자유롭게 다니지만, 그 때는 포장도로 없이 그저 차가 겨우 교차해서 갈 수 있는 형편이었어요. 소나기가 쏟아지니까 미끄럽지…, 후방에서 군수용 물자를 전방에 가져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미끄러져서 전복되고 이러니 정말 아수라장이었어요.

 

총과 포탄이 날아다니고, 굉음이 일렁이던 1950년 전장에 전투 경험은 커녕 총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던 19살의 청년이 투입됐습니다.

 

[김성태] 박격포를 쏘면 소가 쓰러지고 사람들이 막 죽어가고, 거기 하사관 학교에서 동원된 사람이 전투를 해봤겠습니까.

 

청년이 안쓰러웠는지 주민들의 온정이 이어집니다.

 

[김성태] 우리는 그때 밥도 못 먹었어. 거기 가니까 군인이 왔다고 하면서 밥을 해줬어요. 두 끼 세 끼 씩 굶었으니까, (밥이) 먹히지 않더라고요. 속에서 받지 않아. 그래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된장 물을 풀어서 한 그릇 주더라고요. 그걸 먹으니 속이 편안해지고 밥을 먹게 됐어요. 다음 날이 밝아서 산에 올라가 전투를 하는데… 적들이 계속 박격포며 기관총이며 의정부로 땅굴을 파고들어 오는데, 거기서 맞대응을 못 했지.

 

전면공세로 쳐들어오던 북한군을 피해 잠복하고 있던 김 씨. 하지만 동료가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김성태] 잠복하고 있다가, 밤에 습격하려고 했는데…. 낮에 중대장이 박격포에 맞아서 부상을 당했어요. 그래서 산에서 ‘성태야, 성태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했어요. 중대장인데 그냥 도망칠 수는 없잖아요. 업고 내려오다가 박격포 파편에 맞아서 나도 포로가 됐어. 전쟁 사흘, 나흘 만에 포로가 돼서….

 

전쟁이 시작된 지 6일째인 630, 국군포로가 된 그는 북한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김성태] 열차를 타고 함경북도 회령에 갔어요. 군마 훈련소 자리인데, 거기 가니 벌써 포로들이 수없이 많아요. 거기서 외부와 차단된 그 안에서 있었죠.

 

좁고 더러운 방을 30명이 나누어 쓰던 그 당시를 그는 잊을 수 없습니다. 몸을 씻을 수도, 제대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김성태] 한 방에 30명 정도 있었는데, 자루로 볏짐을 싸서 누워서 바닥에 깔아서 사용했는데…, 그래서 먼지가 뽀얗고, 한 달 쯤 되니까 목욕도 안 시키고. 짐승, 돼지만도 취급을 못 받았어요. 이부자리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자기가 입고 갔던 옷을 입고. 사람이 잘 먹다가 마르니까 이가 생겨요. 이가 자고 일어나 빗자루로 쓸어 다르면 엄청 나와요. 목욕도 한 번 못 하고. 아침 식사를 하면 통에 밥을 주는데, 반찬은 없고 된장국….

 

배고픔에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낙원이라고 포장하며 사회주의를 선전하던 북한 당국.

 

[김성태] 첫째는 배가 제일 고프고, 먹을 게 없어서. 간식도 없고. 3개월을 거기서 지냈어요. 사람들이 전염병이 걸려서 많이 죽었어요. 노래도 배우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좋다고. 요구에 의해 분배하고 먹고 하기 때문에 세상 낙원이라고 하며 선전하더라고요.

 

마침내 그들은 도주를 결심합니다.

 

[김성태] 내가 포로가 돼서 도주를 몇 번 했어요. 붙잡혀서 독방 생활도 했는데. 내가 분대장이에요, 그래서 대원들은 1953 7 18일에 한국에 넘어오려고 야간 준비 훈련을 하고…. 한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넘어가자고 모의한 걸 한 놈이 정보과에 보고를 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탈주 계획은 한 동료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됩니다.

 

1953년 휴전 선언이 있기 불과 3일 전인 725, 그는 조국 반역자로 재판에 회부돼13년 형을 받게 됩니다.

 

[김성태] 내 목적을 실현 못하고 거기서 13년 생활을 했지. 그래서 7 27일이 휴전일이잖아요. 3일 후에 휴전일인데, 나는 붙잡혀서…. 재수가 없으려니 말이지.

 

수감생활을 하며 평양 복구 건설에 동원된 김 씨. 하지만 그는 도주를 멈추지 않습니다.

 

[김성태] 그래서 거기서 1954년에 평양복구건설이 시작됐는데, 거기에 전 국민 (역량이) 집중됐지. 우리는 남포 제련소에서 벽돌을 만들고 했는데, 거기서 또 도망을 쳤어요. 1954년도. 배가 고파서 어디 가려고 아침 새벽에 도로로 걸었는데 경비대들이 내복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붙잡혔지. 그래서 15일간 독방 생활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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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서울 국립묘지에서 마스크를 쓴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국가를 위해 사망한 동료 군인의 묘비에서 경례하고 있다. /Reuters

 

[기자] 여러 번 도주를 시도하셨는데, 계속 실패하셨잖아요. 한국에 오는 걸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성태] 내 형제 조국이 있으니 포기할 수가 있겠어. 현실이 틀렸으니까. 내가 마음에 들고 정책이 마음에 들면 거기 있자고 하겠지. 정책 자체가 거짓말하고 사람 죽이고 하는데. 난 고향도 여기고 살기도 좋고 하니까 한국으로 오려고 한 거지.

 

하지만 13년의 수용소 생활 후 김 씨를 기다리는 건, 강제동원이었습니다.

 

[김성태] 수용소에 가서 13년이라는 생활 동안 결핵도 걸리고. 66년도에 석방이 됐어요. 그래서 함경북도 원송군 주원리 숙소에 넣더라고. 거기서 며칠 쉬지도 못하고 탄광에 들어가니까…, 거기 갱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그랬어요. 탄을 삽질을 하니까 한 삽도 못 뜨겠더라고.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돈이라는 것도 모르고.

 

김 씨는 소개를 받아 평양에서 온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김성태] 그러면서 아들 두 명 낳고, 아내가 암에 걸려 죽었어요. 그래서 내가 (두 아들을) 키우다가 한국으로 넘어왔지. 아들을 데리고. 아들 하나는 죽고. 내가 말을 다 못해. 말을 하면 눈물이 나요. 정말 감방생활부터, 사회에서 90년대 당시에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몰라요. 96년도에 먹지 못해서.

 

그렇게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던 김성태 씨는 마침내 2001년 탈북에 성공합니다.

 

[김성태] 2001년에 한국에 왔어. 2001 5월에 두만강을 건너 동생을 만났지. 동생이 왔어요. 50년 동안 못 만났는데, 남인지 동생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내가 학교 다닐 때 동생의 몸에 뭐가 있고 그런 걸 다 기억이 났어요. 그래서 아 형님이 맞다고, 내가 맏이고 아버지 어머니 이름도 다 얘기하고 형님이 맞다고 그러지.  

 

중국에서 한국행을 앞둔 김 씨는 설레는 마음에 밥조차 먹을 수 없었습니다.

 

[김성태] 10시쯤 되니까 브로커 두 사람이 와서 자기네 집으로 안내하더라고. 다음날 12시가 되니 식당으로 갔어요. 고기를 구워주고 했는데 못 먹겠더라고요. 너무 흥분하고 그래서….

 

김 씨는 마침내 한국행 배에 몸을 싣습니다. 

 

[김성태] 택시를 타고 대련, 큰 항구로 갔어요. 화물선을 대고 있더라고요. 동생과 여러 사람들은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가고, 이틀 밤 자고 인천항에 도착했어요. 이게 6 14일 이에요. 거기서 사진도 찍고. 대성공사가 있어요, 서울에. 거기서 보름간 심사를 해요. 북한에서 살던 거를 다 이야기하고. 그리고 전역식을 하고.

 

[기자] 전역식도 하셨어요?

 

[김성태] 그럼. ‘차렷’하고. “70살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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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국가유공자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고있는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어르신. /RFA Photo

 

1950630, 열아홉의 나이로 떠난 조국.

 

2001614, 일흔 살이 된 김 씨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습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51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의 심정을 묻는 질문에 김 씨는 미소로 대답합니다.

 

[김성태] 야 정말 지상낙원이었어. 이렇게 한국이 발전한 게. 우리 때는 초가집만 있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 고층 건물이고. 전역식하고 나왔지.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 이런 사회도 있는가 했어.

 

한국에 온 지도 20년이 훌쩍 지나 어느새 아흔 살을 맞이한 그는 상기된 얼굴로 누리호 발사 성공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김성태] 난 정말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아.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이 이렇게 밤잠을 못자고 세계 일곱 번째로 누리호 발사에 성공했으니 난 정말 꿈에도 나오더라고. 나 정말 기분이 좋아서 손뼉을 치고 절도 하고 그랬어.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야기하는 김 씨의 눈에는 단호함이 묻어납니다.

 

[김성태] , 세상이 그렇구나.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거야 바로. 우습게 보고 말이지 침략하는 게 괘씸하단 말이지. 약소국이라고 우습게 보다가 많이 손해 보고 지금 전 세계가 어려움에 처해있잖소. 집 없이 가족을 잃고, 집도 잃고. 세계 각국이 우크라이나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서 우리와 같이 먹고 살게 해줬으면 좋겠어.

 

청년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노인이 되어서야 조국에 돌아온 김 씨는 노란색의 ‘6.25 국가유공자문구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김성태]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지,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당하고 모든 집들이 파괴되고. 이런 참혹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기자 천소람,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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