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잘 듣지 못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안 엘레나] 새벽 4시쯤 포탄 소리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포탄이 아니라, 어디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총소리와 포탄 소리가 들려서 그때야 ‘전쟁이 시작됐구나’라고 이해했습니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미콜라이우의 시골 마을에서 안 엘레나 씨의 집은 직접 폭격을 맞았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안 씨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청각장애를 가진 딸과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지은 집이었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웃 주민의 집 지하실에 한 달 가까이 피신했던 안 씨 가족은 매 순간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고 회상합니다.
[안 엘레나] 처음에는 내일이나 모레쯤 전쟁이 끝날 거라는 희망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지 않고 매일 시내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겁니다. 피신해 있는 동안 물과 전기도 없었고, 지하에 피신해 있을 때도 집 다락이 무너지면서, 그 순간에는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7월 13일, 한국 광주에서 만난 안 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맨손으로 닦아냈습니다. 두 살 때 청력을 잃은 그녀의 딸은 놀란 눈으로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이내 마음을 알아챈 듯 엄마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안 씨는 매일 들리는 고막을 찢는 듯한 포탄 소리에 오히려 딸이 청각장애인인 것이 감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안 엘레나] 남편 없이 홀로 키웠지만, 딸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제 딸이 잘 듣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왜냐하면 , 딸이 그 포탄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무 무 서워했을 겁니다 . 저와 딸은 서로 안아주면서 " 걱정하지 말라 "고 위로해줬지만, 너무 무서워서 많이 울었습니다 .
안 씨의 딸 박 스베틀라나 씨는 ‘전쟁이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무용수가 꿈이었던 그녀는 휴대전화로 자신의 공연 동영상을 계속 돌려보지만, 이를 바라보는 안 씨의 표정은 어둡기만 합니다.
[박 스베틀라나] 저도 너무 무서웠고,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영상통화로 친구들과 대화하는데, 늘 우울하다고 합니다. 공습 경보음을 들을 때면 숨어야 하고요. 가족 중 남자들은 전쟁터에 나가야 해서 우크라이나를 떠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너무 걱정됩니다.
폴란드를 거쳐 지난 3월 광주에 정착한 안 씨 가족은 주변의 도움으로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합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무용수가 되고 싶었던 딸의 꿈이 무너진 것이 안 씨에게는 가장 가슴 아픕니다. 전쟁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안 씨의 눈물은 딸의 위로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다로 간 아들
이틀 뒤 안 엘레나 씨의 집에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충청남도 부여의 시골 마을에서 윤청자 씨를 만났습니다.
윤 씨도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을 겪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대는 이유입니다.
[윤청자] 우리 사촌 오빠도 6.25 때 전사했어요. 전쟁처럼 무서운 게 없어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 알겠어요. 가슴만 아프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누가 좀 말려줄 수 없을까’,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국 전쟁과 한반도 분단이 낳은 갈등의 씨앗은 어느 날 윤 씨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꿔놨습니다.

[KBS 보도] 우리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에서 침몰했습니다. 승조원 46명이 아직 실종상태입니다.
[윤청자] 그날 밤 서해에서 배가 폭발했다고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내가 우리 영감님한테 “여보, 우리 평기가 서해 바다에 있어? 동해 바다에 있어?” 그랬더니 “평기가 서해 바다에 있지” 그러더라고. 그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막 두근두근거리는거예요. 이상하게 그냥 마음이 불안하고 죽겠더라고요.
2010년 3월 26일 밤.
아들이 타고 있던 배의 사고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그날에 대한 윤 씨의 기억은 또렷했습니다.
[윤청자] 폭발해서 물기둥이 올라가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더니 생존자를 찾아서 건져내고 있다고 그래요. 그냥 마음이 불안해요. 그러더니 바닷속에서 아직 찾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하더니 다섯 번째에 가서 ‘민평기’가 나오는 거예요.
[KBS 보도] 네. 우선 이 시간 실종자 46명의 명단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원사 이창기, 상사 최한권, 남기훈, 최정환, 민평기...
[윤청자] “아이고 어쩐다니. 여보, 아이고 우리 평기, 우리 평기 나왔어. 어떻게 하면 좋아.” 그때가 아침 대여섯 시쯤 됐는데, 추운 때였어요. 제가 맨발로 막 뛰어간 거죠.
그때까지도 윤 씨는 아들이 살아있을 거라 굳게 믿었고, 지금 달려가면 아들을 찾을 것만 같았습니다.
[윤청자] 거기서 공기를 넣어줘서 배 안에 있으면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희망에 얼마나 애가 터지는지. 내가 가면 건질 것만 같아서 별짓을 다 해 봐도 안 되고. 금방 나올 줄 알았더니 한 달이 가도 안 나오잖아요.
[YTN 보도] 네. 민평기 중사 시신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이 속보로 들어왔습니다.
[윤청자] ( 우리 아들을 ) 태극기로 이렇게 덮어 놨더라고. 그리고 얼굴만 이렇게 내놨더라고요. (얼굴이) 하나도 변함이 없더라고요. 몸이 불지도 않았어요. 그 물이 얼마나 찬지.

민평기 씨는 윤 씨가 임신 8개월 때 큰딸을 익사 사고로 잃은 슬픔 가운데 지켜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열한 달이 다 돼서야 장기가 다 보일 만큼 작은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지켜낸 아들이 어느덧 군대에 갈 나이가 되어 해군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했습니다.
[윤청자] 저는 딸을 물에서 보냈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렸더니, 내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 이놈이 해군 신청을 한 거예요. 눈물이 쭉 나오더라고요. “야, 누나도 그렇게 물에 갔는데, 어째서 해군을 가려고 하느냐. 해군은 배 타고 물속에 있어야 하잖아” 그랬더니 “어머니, 남자는 뭐든지 다 경험을 쌓고 해야 앞으로 장래성이 있는 거예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아들은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한 천안함에서 다른 45명의 용사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전쟁의 고통을 이겨낸 엄마의 사랑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 동안 어떻게 사셨냐’는 물음에 윤 씨는 “미쳐서 뛰어다녔다”고 답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었고, 북한의 공격으로 아들을 잃어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윤 씨는 슬픔에만 머물기보다 또 다른 전쟁의 비극을 막기 위해 나섰습니다.
아들에 대한 보상금에서 한국 돈 1억 원(약 7만 5천 달러)을 내놨고, 그 돈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3.26 기관총’ 18정의 씨앗이 됐습니다.
[윤청자] 6.25 때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으니까, 총알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서 나라를 지켜달라고. 나 같은 부모가 안되게 해달라고 했죠.
또 윤 씨는 2014년에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생활고 소식에 충격을 받고, 직접 에티오피아를 방문해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한국 돈 2천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윤청자] 내가 아들과 딸에게 사정했어요. 6.25 때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고. 6.25 때 한국에 와서 도와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됐는데, 그걸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고.
아들을 떠나보낸 뒤 12년 동안 바뀐 계절만 수십 번, 어머니의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됐고, 얼굴과 손등의 주름도 깊어졌지만,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집니다.
[윤청자] 겨울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잖아요. 그런데 봄이 되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는데, 평기는 영원히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우리 평기도 겨울에는 자고, 봄에는 나와서 엄마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죠.

우크라이나 난민 안 엘레나 씨는 두 달 뒤 제작진에 반가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딸이 치료를 통해 더 잘 듣게 됐고, 조금씩 한국말도 하면서 새로운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무용수의 꿈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전쟁과 갈등으로 원치 않는 고통을 겪은 두 엄마, 안 엘레나 씨와 윤청자 씨.
전쟁의 참상 앞에서 두 엄마는 잠시 무기력했지만, 딸과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를 이겨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두 엄마는 전쟁의 아픔을 잊는 대신 이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자 노정민,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