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생산 중심 농업전환은 김정은의 도박”
2022.02.28
앵커: 김정은 북한 총비서가 옥수수에서 밀∙보리 농사로 농업 정책 방향 전환을 밝혔는데요, 이모작을 통해 밀과 보리의 생산량을 늘려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식품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북한의 농업 환경을 고려할 때 과연 이 정책이 실현 가능할지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밀∙보리 농사 장려에 대한 북한 내부의 분위기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노정민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다른 곡물보다 월등히 비싼 밀가루
[조선중앙TV] 농작물 배치를 대담하게 바꾸어 벼농사와 밀, 보리농사로 방향 전환을 할 데 대한 구상을 밝히시면서….
북한 관영 언론매체가 (2021년 9월) 보도한 김정은 총비서의 시정연설 중 일부입니다.
당시 김 총비서는 새로운 농업 정책으로 ‘옥수수에서 밀과 보리농사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을 강조했습니다.
이어 (지난해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 회의에서는 ‘협동농장의 대부 상환 면제’를 언급하면서 식량 증산에 대한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과거 김일성 시대에는 옥수수, 김정일 시대에는 감자 생산을 장려했는데 김 총비서는 밀과 보리 생산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띕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비루스의 대유행, 북중 국경 봉쇄 등으로 식량 상황이 악화하자 식량 부족분을 밀과 보리로 보완하려는 목적과 함께 주민들의 식품 소비 구조의 변화에 발맞춰 기본 주식을 쌀과 옥수수에서 쌀과 밀가루로 바꿔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지적합니다.
북한 농업 전문가인 권태진 한국 GS&J 인스티튜트 북한동북아원장은 (2월 24일) RFA에 밀가루가 북한 시장과 식품 산업에 매우 중요한 원료이지만, 대부분 중국에 의존하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권태진] 주민들은 사실 밀가루를 선호하죠. 하지만 지금 북한에서 밀가루 가격이 굉장히 높습니다. 북중 국경이 닫혀 있기 때문에 밀가루를 제대로 수입하지 못해서 쌀 가격보다 비싸죠. 작년과 재작년의 경우 북한이 수입한 전체 곡물 중 98%가 밀가루였습니다.
한국무역협회의 해외 무역통계에 따르면 (2021년 12월 10일 기준)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곡물 중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큽니다. 수입 규모도 2015년의 560만 달러에서 2019년에는 7천3백만 달러로 급등했다가 코로나 대유행으로 북중 국경이 봉쇄된 2020년에는 3천5백만 달러로 급감했습니다.
최근 (2월 18일) 북한 시장의 물가를 살펴보면 쌀이 1kg에 약 5천 원, 옥수수가 2천400원인 데 비해 밀가루값은 상대적으로 높은 7~8천 원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한국 농촌진흥청이 추정) 중 밀과 보리는 16만 톤으로 쌀 216만 톤, 옥수수 159만 톤, 감자 57만 톤에 비해 현저히 적습니다.
일본 ‘아시아프레스’의 이시마루 지로 오사카 사무소 대표는 (2월 25일) RFA에 북한의 협동 농장에 밀 농사에 대한 지시가 내려왔지만, 아직 뚜렷한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일반적으로 북한 주민들이 옥수수보다 밀을 반가워합니다. 여러 가지 가공도 가능하고요. 하지만 생산에 있어서 옥수수처럼 간단치 않고 제한이 많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 내부에서도 농장에 그런 지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좋은 방향이란 호평 등은 아직 나온 것이 없습니다.
밀 생산 주력 방침에 ‘김정은의 도박’이란 우려도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밀∙보리의 농사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북한의 농업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북한이 밀과 보리의 생산량을 늘리려면 재배 면적의 확대가 필요한 데 일차적으로 쌀과 옥수수의 재배 면적을 줄이기보다 이모작을 통한 밀∙보리의 재배 면적을 확보하면서 전체 곡물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중장기적으로 옥수수 대신 밀 재배 면적을 더 확대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이모작을 통해 밀∙보리의 생산량을 늘리려면 지력 유지를 위한 비료가 충분히 확보돼야 하는데, 만성적인 비료 부족을 겪는 북한에서 이모작 농사가 잘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북한 교수 출신 탈북민 김현아 씨는 (1월 17일) RFA에 북한 주민에게 쌀밥과 빵을 주식으로 해주겠다는 농업 정책은 반갑지만, 비료 부족과 낮은 지력 탓에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김현아] 북한 지도부는 밀과 보리농사에 대한 이모작 면적을 늘리는 방법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상황에서 이모작 농사가 해법이 되겠는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올해 필요한 비료를 충분히 공급한다는 담보도 없습니다. 또 지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이모작 농사는 오히려 주 작물의 수확고를 낮추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김영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최근 (2월 10일) ‘북한의 식량∙농업 상황과 전망’에 관한 보고서에서 밀 농사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이모작의 확대가 필요한데, 비료와 기계 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모작을 늘릴수록 토양 수탈과 수확 후 손실 증가 등을 피하기 어렵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대표는 올해도 기본적인 쌀과 옥수수 작황에 대한 우려가 큰 때에 갑작스러운 농업 정책 변화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 밀 농사로 바꾸자는 것은 농업의 큰 방향 변화인데, 준비가 잘 안 돼 있는 이 코로나 시기에 너무 무리하게 추진하면 농업 생산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비료 수입에 큰 지장을 받고 있고, 지금까지 해 온 쌀과 옥수수 농사도 올해 충분히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걱정을 내부에서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 농업 정책을 이렇게 바꾼다는 것에 대해 그만큼 기대할 만한, 아니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RFA가 (2월 23일) 접촉한 중국 단둥의 무역업자도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주민들로부터 “이모작으로 밀∙보리 농사를 추진하다가 오히려 주식인 옥수수 생산량이 떨어질까 우려된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는 김 총비서의 도박’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권태진 원장은 당장 종자와 비료 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김 총비서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전혀 불가능한 도전은 아닐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권태진] 올해는 필요한 농자재와 종자를 구하기 어렵더라도 일 년이 지나면 내년부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또 중요한 농자재가 바로 비료일 텐데, 사실 재배 면적이 크지 않기 때문에 비료의 부담도 사실상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어차피 옥수수에도 비료가 많이 들어가거든요. 밀∙보리를 재배할 때 같은 면적이라면 옥수수보다 비료가 적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최고지도자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북, 밀 농사로 식량과 산업 두 마리 토끼 노릴까?
밀∙보리 농사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단순히 전체 곡물 생산량을 늘리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시장에서 음식 장사를 할 때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이후 식품 가공 산업이 확대하면서 주원료인 밀가루의 공급이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권태진 원장] 북중 교역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음식 장사로 돌아서거든요. 음식 장사를 하려면 가장 중요한 원료가 밀가루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해서 먹고살려면 밀가루가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또 북한 경공업의 대표적인 산업이 식품 산업인데, 밀가루가 없으면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식품 가공 산업이 고용 창출 능력도 있고,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중요한 분야거든요.
또 수입에만 의존하던 밀과 보리의 생산 증대를 꾀해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김정은 정권이 연일 새로운 농업정책을 내놓으며 생산 증대를 독려하지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폐쇄적인 경제정책, 사회주의 경제 체제 탓에 식량난 해결은 쉽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제한된 북한의 농업 환경에서 밀 생산의 증대로 흰쌀밥과 빵을 주식으로 하겠다는 김정은 정권의 의지가 실현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
기자 노정민, 에디터 박정우,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