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매년 12월 3일은 유엔이 지정한 '국제 장애인의 날'(International Day of Persons with Disability)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이날을 맞아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고 북한에서 장애인으로 살았던 어머니를 둔 20대 탈북민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요.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암울한 현실, 북한의 장애인 정책과 사회적 인식 등을 짚어봤습니다.
최근 들어 북한 김정은 정권이 장애인 인권 개선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인권 전문가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지적입니다.
보도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어머니 … 한국에서 '휠체어' 처음 봐
2018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대학생 맹효심 씨.
그의 어머니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앓은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맹효심] 어머니가 태어난 연도가 1970년대였고, 그 당시 북한에서 소아마비가 유행했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소아마비라는 걸 알게 됐어요. 병원에 갔지만, 이미 늦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양강도 혜산시가 고향인 맹 씨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일상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집안일뿐 아니라 외출도 쉽지 않았습니다. 탈북 당시에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강과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맹 씨는 어머니가 장애인이었지만, 북한에 장애인 복지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고, 실질적인 혜택을 받은 적도 없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밝혔습니다.
[맹효심] 북한에는 복지 혜택이 없어요. 북한에 장애인을 위한 법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한국에 와서 알게 됐는데, 법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게 없었어요.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어머니가 (북한에서) 살아오신 동안 그런 혜택을 받지 못했어요.
무엇보다 맹 씨가 한국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휠체어’였습니다.
북한에서 그의 어머니는 목발을 짚거나 남들의 부축이 있을 때만 이동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야 휠체어란 의료 보조기구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맹효심 ] 북한에서는 휠체어가 없으니까 어딜 갈 수도 없어요 . 북한에서는 아버지가 항상 어머니를 업고 다녔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휠체어를) 알게 됐어요. 여기 와서 휠체어를 사용하니까 어머니가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 북한에서는 장애인들이 휠체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 TV에서 겨우 한 번 본 거예요. 그게 다인 거예요.

이와 관련해 안경수 한국 통일의료연구센터장은 RFA에 북한에서 의료기기에 대한 접근성이 국제 기준에서 상당히 떨어지는 수준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안경수] 일단 북한의 '장애자 보호법'을 보면 교정기구나 휠체어, 보청기 등 장애인 보조기구를 계획적으로 생산, 보장하라고 명시는 돼 있습니다. 하지만 질적으로 굉장히 열악한 건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이 아주 열악했는데, 2010년대 이후에는 많이 개선되고는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각종 의료 기기, 보조 기구들에 대한 접근성 제한이 많이 양호해진 건 사실인데요. 그럼에도 아직은 중국을 통한 국제사회의 지원, 민간 단체나 남한 단체들의 대북 지원 등을 통해 휠체어나 보청기 등 보조기구들을 지원받고 있는 수준입니다. 아직 많이 미흡하다는 걸 짚어드리고 싶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도 시급
맹 씨는 “북한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뭐라고 생각하느냐”란 RFA의 질의에 “장애인 가족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충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겁니다.
[맹효심] 경제적인 면에서 일을 해도 국가에서 아무것도 주질 않으니 살기가 힘듭니다. 장애인은 더욱 어렵죠.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한데 그런 것이 전혀 없어요. 또 이동의 자유가 없어서 항상 집에만 있어야 해요. 그러면 우울증 같은 병에 걸릴 수 있고요.
또 맹 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장애인에 대해 ‘불구’라는 표현도 스스럼없이 사용합니다. 그가 어렸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어머니가 놀림이 대상이 된 것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깊은 상처입니다.
[맹효심] 장애인을 '불구'라고 부르면 화가 나요. 그런데 어찌할 수 없어 상처를 받습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불구'라고 부르니 상처받죠. 어른들조차도 제 어머니를 '불구'라 부르는데, 저에 대해서도 '효심'이라고 부르기보다 '누구의 딸'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그 집에 불구있는 그 집 딸'이라고 부르는 식이었어요.

이와 관련해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서울지부는 지난 11월 29일 RFA에 “북한에서 장애인은 나약함과 수치심의 상징으로 인식돼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또 교육을 비롯한 공공 서비스 접근에서 차별받을뿐 아니라 대중교통, 주택 등에 대한 물리적 접근도 제한돼 있다고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덧붙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지난 9월 26~27일에 개최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9차 회의에서 '장애자 권리 보장법'을 채택했습니다.
“장애인들에 대해 보다 훌륭한 생활 조건과 사업 조건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법안의 주요 골자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많은 인권 전문가는 북한 장애인의 생활과 인권 개선을 위해서는 북한 당국과 국제사회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북한 내 장애인의 삶의 질과 인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접근성이 보장돼야 하는데, 현실을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HRNK)의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RFA에 “북한이 장애인 권리에 관한 유엔 협약(CRPD)에 가입했지만, 실제 장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외부에서 북한 장애인 정책의 실상을 진단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북한 당국은 장애인 인권에 관한 국제사회의 지적에 대해 개의치 않기 때문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닐 겁니다. 아마도 오히려 많은 장애인을 카메라 앞에 내보내거나, 심지어는 유엔 연설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 정권의 간섭 없이 북한 사람과 대화할 수 있고, 감시와 평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이러한 노력은 빛을 발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매우 힘든 일입니다.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히로시마 대학교 객원교수 겸 아사히신문 외교전문기자도 최근 RFA에 “과거 취재 목적으로 몇 차례나 북한에 들어갔지만, 장애인을 본 기억은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마키노 기자는 과거 김정일 시대에는 ‘혁명의 수도’인 평양에서 장애인의 존재가 공공연히 ‘수치’로 인식됐지만, 김정은 시대에는 장애인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정책의 변화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차이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사례에서 북한이 장애인 인권 개선에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연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 두드러진다며, 이에 국제사회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장애인 인권에 관한 개념 확립이 시작점”
올해도 유엔이 지정한 국제장애인을 날을 맞았지만, 국제사회는 여전히 북한 장애인의 인권 상황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올해 19년 연속으로 유엔에서 채택된 ‘북한인권결의안’에도 북한 장애인의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가 담기기도 했습니다.
또 유엔 ‘장애인 권리위원회’는 지난해 9월, ‘장애인 권리조약’ 이행과 관련해 북한 당국이 제출한 보고 내용을 검토한 뒤, ‘장애인 보호 관련법 안에 차별적인 용어가 포함돼 있는지’, ‘장애인을 위한 시설 정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등 30개 항목의 질의서를 북한 측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 줄리 터너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장애인 권리 증진을 위한 법률 이행과 관련해 미국의 경험을 북한과 기꺼이 공유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도 RFA에 김정은 정권이 국제사회와 협력하고자 하는 인권 문제 중 하나가 ‘장애인 권리’라며 국제사회가 북한으로 하여금 장애인 권리를 보호하고, 유엔 기구의 권고사항을 이행할 수 있도록 격려와 지원을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탈북민 맹 씨는 북한 주민이 장애인의 인권에 관한 개념부터 알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작 북한 주민은 이에 대해 백지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맹효심] 우리는 그런 법이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래서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법이 있다면, 사회복지센터 같은 곳에서 혜택을 주고 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북한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따라서 어디에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끝으로 맹 씨는 비록 북한에서 장애인이었지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떳떳하게 살아온 어머님과 항상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또 북한에도 휠체어가 많이 보급돼 장애인의 이동의 자유가 더 많이 보장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습니다.
[맹효심] 휠체어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가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휠체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찾아와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맹 씨는 북한 장애인의 인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며, 앞으로도 장애인 가족으로서 본인이 북한에서 겪어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내 장애인의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도 이어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