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머피] 저희는 당장 빠져나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출부터 정오까지 북한의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사이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배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나포 뒤 원산항으로 끌려갔으며 푸에블로호의 부함장이었던 에드워드 머피 씨를 포함한 82명의 승조원들은 북한에 11개월간 억류됐습니다. 당시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은 평양 인근 수용소에 감금된 채 고문과 구타, 강압적인 심문을 당했습니다.
[제임스 켈] 우린 늘 두들겨 맞았고, 억류 기간 내내 심리적인 고문도 당했습니다. 또 그들은 가끔 권총을 들고 와 보는 앞에서 해머를 뒤로 젖혀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곤 했는데, 장전되지 않은 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심장을 내려앉게 했습니다. 다리로 의자를 들어 올리거나 팔을 때리는 식으로도 고문했어요. 이 밖에도 많은 고문이 있었습니다. 승조원들이 그 닭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많은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머피 씨가 북한에 억류됐을 당시 그에게는 두 살배기 아들과 임신 7개월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전 그 당시 아내에게 인사하지도, 갓 태어난 딸에게 말을 건네지도 못했어요. 불행히도 전쟁 당시 모든 실종자와 전쟁포로의 가족들에게도 해당되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락할 자유를 잃었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전쟁 실종자 가족들은 아직도 그 마무리를 짓지 못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은 미북 간 협상 끝에 그 해 12월23일 판문점 자유의 다리를 통해 귀환했습니다. 나포 과정에서 총격에 숨진 수병 1명의 시신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머피 씨는 북한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이 건넨 첫 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에드워드 머피] 제가 풀려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들 인생의 3분의 1은 아버지 없이 지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전쟁 중 실종된 사람과 전쟁포로 가족의 아이들은 전쟁의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아들의 미소와 함께 ‘당신이 우리 아빠예요?’라고 물었던 걸 아직도 기억합니다. 다른 애들은 아빠와 엄마가 있었지만, 우리 아들에게는 아빠가 없었다는 것, 이는 전쟁의 참상 중 하나입니다.
현재 푸에블로호는 평양 대동강 변으로 옮겨져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안보교육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