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다우] 제가 졸업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졸업 후 바로 전쟁터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가 이끌던 소대는 그 해 11월2일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압록강 신의주 지역까지 전진했지만, 밀려 들어오던 중공군으로 인해 평안북도 안주 지역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마이크 다우] (1950년) 11월 2일 밤, 강행군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압록강에서 공격을 받은 남한군 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 운산으로 밀고 올라가던 중, 중공군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중공군과 교전 끝에 포로가 된 그는 ‘죽음의 행진’을 거쳐 당시 ‘죽음의 계곡’으로 불렸던 벽동 포로수용소로 이송됐습니다.[마이크 다우] (포로수용소로 이동하는 중에도)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상자든 누군가가 뒤처질 경우, 그 뒤처지는 사람들의 뒤에서 중공군이 총을 쐈고, 그 사람은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다우 씨가 수감된 포로수용소는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 해 겨울 동료 전쟁포로 400여 명이 영양실조로 죽거나 동사하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마이크 다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시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가 옮지 않도록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을 밖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수록, 수용소에 더 넓은 공간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는 공간이 비좁아 한 명이 돌아누울 때면 다 같이 돌아야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탈출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마이크 다우] 수용소 가장자리에 분뇨를 퍼내 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습니다. 이 분뇨는 비료로 사용할 수 있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제 몸을 가능한 한 둥글게 말았어요. 그리고 수용소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포로 교환을 위한 재판에 회부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무리에 들어갔어요.
다우 씨는 수용소에서 탈출할 때 가져온 밥그릇과 컵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7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함께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을 위해 매일 밤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이크 다우] 저는 아직도 매일 밤 저와 함께 전투를 벌이던 전우들과 군대, 그리고 육군 병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매일 밤 기도합니다.
또 그는 미 군종 신부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돌보다 병사한 ‘한국전쟁의 예수’ 에밀 카폰 신부의 선행을 세상에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마이크 다우] 카폰 신부는 어디든 들르는 곳마다 서로 협력하고 보살피는 정신을 모두에게 보여줬고, 음식을 나눠줬습니다. 카폰 신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고,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다우 씨는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