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탈북 국군포로)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씨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19살의 나이에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5일 만에 북한군과 교전 중 포로로 붙잡혀 북송됐습니다.

[김성태] “나는 동두천 덕정 여기서 전투하다가 중대장이 부상을 당해서 ‘성태야, 성태야’ 하면서 부르더란 말이요. 그 부상당한 사람을 업고 내려오다가 나 역시 부상을 당해가지고. 그래서 6월 30일에 전투도 몇 번 못 하고 포로가 됐어요.”

그는 북한 함경북도 회령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습니다.

[김성태] “그렇게 멸시를 당하면서 거기서 생활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식사라는 게, 그저 알루미늄 식기에다가 밥을 이렇게 담아주는데 양도 줄이고 하니까 사람이 쇠약해지고. 이가 낀단 말이야. 그렇게 벌레가 낀단 말이오.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를 하느라 빗자루로 쓸면 한 바가지씩 이가 나와. 영양실조에 잘 못 먹지, 사람들은 야위지, 목욕도 못 하지, 빨래도 못 하지, 야만 생활이오. 야만.”

그는 신의주 인근 등지에서 군마를 돌보는 등 후방사업에 동원되다 세 차례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돼 군사재판에 회부됐고, 징역 1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김성태] ‘대원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넘어가려고 그렇게 음모하지 않았는가’ 하면서 거기서 발각돼서, 7월 27일이 휴전 아니오. 정전협정인데, 7월 25일에 군사재판에 회부돼서 13년형에 선거권 박탈 3년이란 말이오.



형기 13년을 꼬박 채우고 석방된 김 씨는 탄광으로 보내져 23년간 광부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평양에서 추방된 아내와 결혼해 두 명의 아들을 낳으며 살았지만, 국군포로 출신이란 이유로 늘 감시를 받았고, 아들들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김성태] 너무나도 고달픈 생활을 하고, 식량이 없으면 밤에 배낭을 메고 협동농장 강냉이밭에 가서 몰래 도둑질해 와서 그렇게 연명하면서 자식들을 길렀어요. 그리고 국군 포로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들이 대학도 못 가요. 그저 탄광에서… 그리고 군대도 못 가고.

결국, 김 씨는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강도에게 맞아 사망한 둘째 아들 내외를 뒤로하고 2001년 6월 큰아들과 함께 탈북해 중국 심양을 거쳐 한국에 가게 됩니다. 51년, 그가 다시 고향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김성태] 글쎄 여기가 낙원인지, 천당인지 모르겠더라고. 인천항부터 서울 거기까지 고층 건물이 다 들어섰는데, ‘이게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생각했어요.

직접 전쟁을 겪고, 전쟁포로까지 됐던 김 씨에게 ‘전쟁’이란 단어는 아직도 몸서리치게 하는 기억입니다.

[김성태] 이 전쟁의 참화라는 게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겪게 된단 말이오. ‘도대체 전쟁을 왜 해야 하는가’, ‘이게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전쟁을 하는가’ 이것도 엄청 가슴에 새기게 되더란 말이오.

90세가 넘은 김 씨의 마지막 바람은 북한에서 겪었던 비참한 생활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김성태] 내가 할 수 있으면 북한에서 체험한 것, 내가 살았고 고생한 것, 말로라도 다 알려야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난 그러고 싶어. 내가 정말 인간 대접도 못 받고, 포로 딱지가 붙어가지고. 내가 알고 있고 북한에서 체험한 것을 세계만방에 다 폭로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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