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에 이진서 기자입니다.
천안문 사태는 1989년 6월 4일 있었습니다. 1989년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10년이 된 해입니다. 중국은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개방 정책 덕분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지만 물가도 함께 오르면서 1988년엔 물가 상승률이 무려 15%를 웃돌았습니다.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 그리고 지난 개혁 10년을 되돌아 보며 북경대학 학생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급기야 군부가 천안문 광장에 집결했던 학생들과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천안문 사태는 벌어졌습니다.
개혁개방의 측면에서 본다면 천안문 사태 직후의 1,2년간 중국이 상당히 보수적인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 그런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1989년 6월4일 이후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주요 언론 매체는 사상적 무장을 강조하고, 사회주의 이념의 복귀를 강조하는 논설들을 내놨습니다. 중국의 관료들도 그야말로 '복지부동'하는 즉 눈치만 보고 개혁개방 쪽으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어색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국면에서 돌파구가 된 계기는 1992년 1월의 '남순강화(南巡講話)'입니다. 당시 중국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겨울이 되면 건강상의 이유로 상하이를 비롯한 남부 지방으로 요양을 갔습니다. 그해엔 특별하게 심천을 중심으로, 광동성 남부 지역을 돌면서 개혁 개방을 다시 추진하지 않으면 중국은 막다른 골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경고와 더불어 개혁개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합니다. 이것이 남순강화입니다. 그 후 중국의 개혁개방은 한 단계 상승하게 됩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오승렬 교수입니다.
오승렬: 그 이전에는 지도자의 판단에 의해 정책이 채택됐다면 1992년 이후엔 개혁개방이 제도적으로 추진됐습니다. 1992년 가을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헌법 개정을 의결하게 되고, 이듬해인 1993년엔 드디어 중국 헌법에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새롭게 자리 매김 합니다. 이어서 그동안 중국의 기업 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했는데 회사법, 중국어로 공사법이라는 현대적 기업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됩니다. 1994년엔 현대적 세금제도, 즉 부가가치 세제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적 세금제도가 확립돼서 재정 문제조차도 이제는 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양상을 보입니다.
중국 개혁개방의 성공 사례로 1980년 당시 경제특별지구였던 광동성의 심천은 인구 3만 명의 조그마한 수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심천이 경제특별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연평균 성장률은 38%를 넘고, 현재 인구는 900만 명 이상의 대도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지난 30년간 연평균 GDP, 즉 국내총생산이 거의 10% 가까이 성장했는데도 이제 중국 경제는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오 교수는 지적합니다.
오승렬: 중국은 토지, 생산 수단에 대한 사유제도가 정착하지 못 했습니다. 또 중국 경제가 많이 발전 했지만 정치가 낙후돼 관 주도형, 정부가 모든 부분에 관여하고 또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어서 21세기에 진정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기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지도부가 이런 부분을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 중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1989년 북한에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로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벌어진 천안문 사태는 주민에게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의 말입니다.
김흥광: 북한은 공식 매체를 통해 보도하지 않고 강연회를 통해 알았습니다.
박광일: 북한 내부에선 어떤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김승철: 그때는 통제력이 상당히 강했습니다. 지금 하고는 상대가 안 되죠.
북한은 당시 중국식 사회주의는 사실상 혁명의 원칙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준다는 말이 좋아 보이지만 공화국의 협동농장식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므로 환상을 갖지 말라며 강연회를 통한 주민 단속과 함께 구슬리기에 나섰습니다. 탈북자 김승철 씨입니다.
김승철: 북한이 80년대 중반부터 대주민 회유 선전선동을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일본에서 보상청구권을 받아서 잘 살고, 원유 개발하면 잘 살고, 통일하면 잘 살고 그런 회유를 많이 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80년대를 지나며 중국의 13억의 인구, 굶어 죽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북한 국경을 넘어오던 중국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데 적잖은 충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 당국에선 중국처럼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자하는 노력이 없었던가? 탈북자들은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려고 했던 적이 없다고. 만약 지도자가 한 번 결심을 했으면 북한은 실천에 옮기는 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고.
이와는 달리 한국외대 오승렬 교수는 북한에서 경제개혁을 위한 몸부림은 나름대로 있었지만 중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의 시도가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오승렬: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 틀 속에서 뭔가를 하려고 했습니다. 1984년엔 합영법을 내세웠습니다. 북한 정부는 재일 조총련의 투자를 받아 북한에 애국 공장을 지어 경제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당연히 실패하죠. 시장이 없는 국가에 외국자본이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다음에 1990년대 나진 선봉이나 경제특구 정책도 북한 경제 자체가 시장화되지 않아 중국처럼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이도 저도 안되니까 국내 정책을 개선하면 어떨까 해서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취했는데 그것도 사상적인 부분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에 권력 승계의 과도기에 들어섰다고 북한 외부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북한의 최근 핵실험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 그리고 남북협력 사업으로 진행돼온 금강산 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의 중단은 이같은 북한 내부 사정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사회주의 사상과 원칙을 더욱 강화하는 시점에서 북한에서 개혁개방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조차 못하고 현재의 경직된 상황은 앞으로 당분간 지속할 전망이라고 북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