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지리산에서 처형된 항일 빨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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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제가 북한이 패배를 인정한 유일한 전투인 6.25전쟁 시기 춘천 전투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걸 이야기하다보니 북한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흥미로운 사건도 함께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리산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한 북한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북한에선 절대 말해주지도 않지만, 여기서도 잘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장군만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된 조정철이란 항일 빨치산이 있죠. 151명만 엄선해서 묻은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될 정도면 매우 급이 높은 인물이지만, 그의 비석에 보면 1951년 3월 18일 전사로 돼 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는 없죠. 조정철은 바로 그날 이청송 소장과 함께 지리산 빨치산에게 처형됐습니다.

불멸의 역사 ‘50년 여름’에 52사단장으로 위청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소설에만 등장하고 나중에 북한 역사책 어디를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어 이게 허구의 인물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형 이 되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북한은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하면서 10개 사단을 내려 보냈는데, 이중 중부전선을 담당한 2사 사단장 이청송이 바로 소설 속 위청 소장입니다. 소설 내용처럼 국군 6사단의 영웅적 방어로 전선을 돌파하지 못한 이청송 사단장은 전쟁에서 제일 먼저 해임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소설 속에선 위청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으로 건너가서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소련군 출신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청송은 1940년대 후반 소련으로 도망쳐 온 항일연군을 담당한 소련군의 특무장 출신입니다. 후방공급 잘해주어서 김일성 빨치산의 눈에 들었고, 해방이 되자 이들과 함께 북으로 왔습니다. 소련군과의 관계도 좋아서 출세를 거듭했는데, 6.25남침 전에 함흥에서 만든 2사단을 책임지게 됐습니다.

아무튼 이 이청송이 소속된 2군단이 중부 전선을 돌파하지 못해 전략에 차질이 생기자 1호로 해임됐습니다. 그리고 사단 산하 여단장으로 갔는데, 자기가 지휘하던 부대 하급 지휘관으로 간 것은 엄청난 모멸감을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멸감 이상으로 이청송의 죽음은 더 비극적입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남로당 전남도 위원장 박영발에 의해 처형됐기 때문입니다.

남쪽에서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담은 ‘남부군’이란 책이 1988년에 출판돼 50만 부 이상 팔리며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 지리산 근거지를 찾아왔다가 빨치산에 의해 죽은 ‘남해 여단장’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그가 이청송입니다. 그는 여단장으로 강등된 이후 목포로 파견되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차출해서 여단 만들어오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즉 후방 경비 및 초모사업을 책임진 것입니다.

그런데 후퇴가 시작됐습니다. 목포는 북한으로 탈출하는 탈출로에서 제일 멀고 외진 곳이기도 합니다.

후퇴 명령을 받고 이청송도 여단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타고 떠났는데, 도중에 국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단의 주력은 참모장의 지휘 하에 북한으로 도주했는데, 후미에 있던 이청송과 정치위원 조정철은 포위망을 뚫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청송은 수백 명의 잔당을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왔습니다. 이러면 지리산 빨치산의 입장에선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정규군에 무기도 번듯하니 이들을 포섭하려고 여기저기서 달라붙었습니다.

이청송은 전남 장흥 유치산이라는 곳에 부대를 데리고 가서 은둔했습니다. 아마도 북한군이 다시 내려올 때까지 빨치산 활동을 하며 버티자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 군경 토벌대를 대상으로 전투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대를 유지하려고 그랬겠죠. 하지만 지리산 빨치산 입장에선 얼마나 부아가 터지겠습니까.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아군이 계속 숨어만 있으니 말입니다.

전남도당 책임자 박영발은 사람을 보내 계속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정규군 사단장 출신인 이청송이 어디서 굴러먹던 지도 모를 박영발의 말을 듣겠습니까. 계속 산골 마을에서 버티고 있었죠.

박영발은 분통이 터지죠. 싸움도 안 해, 그렇다고 그 많은 무기도 넘겨 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간 보고 있는 것이 나중에 전황이 불리하면 언제 부대원들을 데리고 투항할 지도 모르죠.

결국 박영발은 부대원들을 보내 이청송의 지휘부를 습격합니다. 당시 북한군 패잔병들은 한 마을에 주둔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러 마을에 분산돼 있었고, 지휘부가 있던 깊은 산골 마을엔 몇 십 명만 있었죠. 이걸 능선을 타고 우회해 습격한 뒤 지휘관들을 다 처형합니다. 이때 이청송도 죽고, 항일빨치산 출신이자 해방 후 평양학원 정치부원장을 지낸 조정철 정치위원도 죽었습니다. 당시 평양학원은 대단한 학교였습니다. 원장은 6.25전쟁 때 북한군 참모장으로 있다가 죽은 안길이었습니다.

박영발은 북한군 소장 이청송과 직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좌급으로 추정되는 정치위원 조정철을 죽인 뒤 이후 이 부대가 군경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거짓말로 발표합니다. 이후 남은 이청송의 부대는 자연스럽게 빨치산에 포섭됐는데, 이중 10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엄청 잘 싸워서 한국 군경의 골칫거리가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편까지 죽여서 혁명을 하려던 박영발의 최후도 비참합니다. 그 역시 투항하지 않고 지리산에서 버티다가 1954년 2월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죠. 부하 간부가 그에게 카빈총을 난사해 죽인 겁니다.

그래도 북한은 그를 견결한 투사로 인정해줍니다. 그래서 지금 북한 혁명열사릉에는 조정철이 안장돼 있고, 그를 죽인 박영발은 애국열사릉에 안장됐습니다. 6.25전쟁이 만든 비극이자, 역사 조작의 달인 북한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북한이 가르치는 역사를 다시 파보면 이런 황당한 일들이 가득합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