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문예이론의 허황성
2013.04.09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김정일 주체 문예이론의 허황성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북한에선 지도자의 비준이 없는 새 노래나 새 영화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 주민들을 정치의 노예이기 전에 혁명 문화의 노예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현재 북한 문화를 주도하는 작가는 시인입니다. 김일성이 생존해 있을 때는 소설 작가들이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체제가 들어서면서 반대로 시인들의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김정일이 시를 좋아해서만이 아닙니다. 주된 원인은 경제 난으로 종이가 부족해서였습니다. 또 굳이 제 돈 주고 혁명소설을 사 볼 충실한 독자가 없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시는 몇 구절만으로도 충성 세뇌의 강요가 가능한 간편한 문학이어서 김정일의 명령 문학의 중요 수단이 됐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북한 시인들의 권위가 다 인정되는 세상도 아닙니다. 김 씨 일가의 신격화는 절대성의 부여를 위해 무조건 형식의 규모를 대형화 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에게도 실력의 차이를 따져 계층을 둡니다. 이를테면 김정일을 서사 시로 찬양할 특권을 가진 명예 시인을 당에서 규정하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그런 서사 시 시인이 6명이었습니다.
조선작가 동맹중앙위원회 시 분과 김만영, 오영재, 조선인민군 문예 창작단 신병강,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부총장 명준섭, 김일성 종합대학 오은별, 그 중 최연소 서사시 시인이 저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나이나 경험으로 따지자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 좋게도 다른 시인들과 달리 ‘통전 부’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져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당 통전 부 직원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의 덕분입니다. 그 스승님은 저와 같은 고향의 황해도 출신으로 시 “나의 조국”의 저자 김상오선생이었습니다. 북한의 3대 시인 중 한 명이었던 김상오선생은 그 당시 통전 부 101연락소 명예 소장으로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노동신문 1992년 2월 19일자는 김정일이 평양 음악무용대학 000학생이 바친 시집 “복 받은 세대의 노래”를 읽고 감사장을 보내 주었다는 기사를 소개했었습니다. 그 꼬마가 바로 저였고, 저를 내세워주신 분이 김상오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김일성 사후 북한에선 서사 시 충성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시인보다 부서 간 충성 경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통전 부만은 작가 집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성의 서사시가 단 한 작품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는 부서 책임자들의 충성 검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급해 맞은 통전 부 간부들은 대남 심리전 시문학을 담당한 101연락소 5국 19부 8명에게 자신들의 충성 운명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적임자가 없는 것이 더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 동안 대남 공작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직업적인 심리전 실무에 길들여진 인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28세 최연소 신입 직원인 저에게 ‘통전 부’는 북한 최고 시인들의 특권인 서사시 과업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첫 작품이 바로 1999년 5월 22일 노동 신문에 전문이 소개된 서사 시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입니다.
남조선 시인 명의로 된 그 서사 시는 제가 평양의 중심인 중구 역 련화동 사무실에서 쓴 대북 심리전 물입니다. 김정일은 “선군 시대의 모범 작품이다.”라며 통전부의 성과를 평가했고, 저는 그 덕에 김정일의 갈마초대소에 초대받아 식사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통전 부는 저에게 김일성 영생일인 7월 8일에 맞춰 “태양의 미소를 노래하노라”는 제목의 서사시를 맡겼습니다.
북한은 수령 영생을 “태양의 미소”로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노동당은 김일성, 김정일 두 이름만 갖고도 반세기 넘게 선전 선동을 해왔습니다. 그에 비하면 “태양의 미소”는 이제 막 시작인 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수령의 미소가 아니라 수령의 눈물 서사시를 썼습니다. 당시 당 선전 선동 부나 무력 부에서 나온 태양의 미소 작품들을 보면 업적의 미소만을 부각시켰습니다.
수령님께서 영생의 높이에서 장군님의 계승 정치가 위대해서 웃으시고, 제국주의 압박에도 끄떡 없는 우리 식 사회 주의를 굽어보며 웃으신다는 식입니다. 저는 그때 남한의 시인 시각에서 본 통전부의 문학은 달라야 한다고 보았습니니다. 그래서 저는 ‘태양의 미소’ 그 뒤로 돌아가 보니 우리 수령님은 고향 집부터 눈물이더라. 이렇게 시작해서 눈물로 인내하는 수령의 역사를 썼었습니다.
그 인내의 눈물이 사랑이 되고, 동지애가 되고, 그렇게 업적의 미소가 된다고 말입니다. 결국 개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인민을 위한 삶을 산 수령! 이것을 함축해서 나중에는 ‘인민이 울어야 할 것은 자신께서 다 흘리셨고, 자신께서 웃으셔야 할 것은 인민에게 다 주시었다, 이런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눈물의 업적에 근거하여 마지막 절정 부분에서는 ‘수령님의 미소는 인민에게 주시면 사랑이었고, 조국에 뿌리시면 햇볕이었고, 역사에 남기면 영생이었더라.’로 끝을 맺었습니다.
북한의 많은 시인들이 서사시 문학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대표 작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주체 문예 이론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시는 내면 심리가 아니라 내면 정서를 다루는 장르여서 눈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개인 염세주의가 된다는 주체 문예이론의 법적 규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3대 시인 중 한명인 김철시인도 눈물을 이슬로 우회적인 표현을 썼다가 10년 넘게 농촌으로 쫓겨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이 구호를 앞세운 고난의 행군시기인데 그 고난을 영도하는 장군님의 눈물 서사시를 쓰려고 한다는데 대해 당 선전선동에서 경고했고, 혁명화 처벌까지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통전 부 간부들도 서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저 개인의 공명심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렇듯 충성도 당의 요구와 원칙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폐쇄 정치의 나라가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나 저는 끝내 눈물의 서사시를 썼습니다. 남한에 와서 북한 주민들이 흘리는 배고픔의 눈물 이라는 시집을 출판했습니다. 주체 문예 이론이 없는 남한에서 저는 비로소 진정한 시인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