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북이 서해교전을 조작한 이유

장진성∙탈북 작가
2011.07.19
memory_westsea_battle-305.jpg 2008년 1월 22일 오후 서해상 문무대왕함에서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은 내 조국에 증오는 원수에게” 이 노래는 6.25전쟁을 다룬 북한의 드라마 주제가입니다. 김정일이 가사가 좋다고, 대중들에게 많이 보급하도록 지시한 이후부터 알려진 노래지요. 북한에선 “사랑은 곧 증오이다.” 이 말을 자주 듣다보니, 또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한에선 듣기 힘든 말입니다. 아무리 미운 감정도 증오라고 표현하면 다들 거부감을 느끼거든요, 그만큼 선진 국가에선 착한 정서를 가진 착한 국민이 될 수 있죠.

오늘 이 시간에는 김정일 정권이 주민들에게 남한에 대한 적대정서를 고취시키기 위해 어떻게 서해교전을 의도적으로 조작했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북한 정권은 서해교전을 남한에 의한 의도적 도발사건으로, 북침 군사행위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해교전은 처음부터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남침도발 행위입니다. 1999년 2월 초 통전부에 남한과의 교전을 기획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통전부는 처음에 당황했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방북하여 어느 정도 투자합의가 이루어졌고, 당시 남한 정치권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경협을 골자로 하는 햇볕정책을 선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김정일도 통전부에 남한의 경제력만을 흡수하는 햇볕정책을 역이용 하려는 전략을 지시했었고, 하여 통전부의 모든 지혜는 이미 그 쪽으로 치우쳐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남한으로부터 식량과 외화를 가져오도록 햇볕정책의 역 이용 전략을 지시하고도 왜 한편 교전을 하라고 했을까요?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우선 첫째가 체제내부 결속용이었습니다. 남한의 대북지원으로 인해 적대감이 희박해지는 북한주민들의 의식변화는 ‘체제불만’을 넘어 ‘체제위협’이 될 수도 있는 요인이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남조선은 북침의 기회를 노리는 민족의 적’이라는 실체적인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둘째는 당시 남한의 보수야당에서 햇볕정책에 대립하여 상호주의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북한정권은 고난의 행군시기 대량 아사를 막기 위해서는 기필코 남한의 대북지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김대중 정부가 당시 보수야당의 이견을 받아들여 햇볕정책에 상호주의를 부분적으로 적용하게 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극도의 체제불안을 느끼는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그 쌀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여 쌀은 받되, 체제는 양보할 수 없다는 강력한 군사적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협상력을 높이기위해서였습니다.

남한은 줄 돈이라도 있지만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북한은 평화협박의 방법만이 협상 가치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출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통전부는 남한의 대북투자기업들을 육지로 안정적으로 유인하기 위해, 군사도발은 바다에서 벌이는 서해 교전 안을 기획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했습니다. 김정일은 그 기획안을 보고 남한기업들과 대북식량을 안정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한편에선 체제불안을 계속 극대화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극찬했습니다. 노동신문을 보면 김정일이 해군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동서남해에 둘러싸인 한반도 지형을 강조하면서, 때문에 오늘날의 전선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바다라고 말했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99년 6월 15일 북한의 도발로 발발된 1차 남북서해교전은 북한의 처참한 군사적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를 첫 시작으로 북한은 NLL전략 단계화에 진입했습니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의 평화인내심에 한껏 고무된 통전부는 대외적으로는 북 핵정치를, 대내적으로는 NLL정치를 고착시키기 위한 전략에 돌입하게 됩니다. 북한이 연평해전 직후 ‘로동신문’ 기사 등을 통해 서해상의 남북 경계선에 대한 구체적인 제의를 내놓은 것은 [도발단계]에서 [관리단계]로 이행하는 절차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상 경계 문제를 남북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장기적인 카드로 만들어 나간다는 복안이었던 것입니다. 통전부가 2차 서해교전을 서울 월드컵이 진행되던 2002년 6월로 정한 것도 이러한 NLL전략의 연장선에서 북방한계선문제를 국제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차 서해교전은 통전부의 기획안에 따라 북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이 총지휘한 사건이었습니다. 김윤심은 연평해전 주역으로서, 서해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2차 서해교전이 발발하기 전인 2002년 4월 13일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뒤를 이어 해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인물입니다.

2002년 5월1일, 김정일은 국제노동절에 맞춰 정례화 하던 공장시찰 전통을 깨고 불쑥 해군사령부를 시찰하여 서해교전과 관련한 점검을 하게 됩니다. 노동신문 5월 2일자 사진을 보면 김정일 가까이 섰던 군인들 대부분이 연평해전 참전자들입니다. 그날 해군사령부 관제실에 들어선 김정일은 전광판 안내를 맡은 지휘관이 “적군과 아군이 똑같이 점으로만 표시되어서 속도가 느린 점을 아군으로 파악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하자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합니다. 경비함이 낙후해서 대부분 선상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전투 환경 때문에 김정일은 함선에 방탄철갑을 입히라고 지시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중량문제로 대신 탱크 포를 내려야 하는데 T-34 탱크에서 포신만 떼어내 배에 부착한 이 포는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조준점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어 북한 경비함의 장점으로 꼽히는 무기였습니다. 결국 방어설비보다는 화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소련제 다발식 고사총을 추가 설치하는 방식의 재무장을 한 채 북한은 2002년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서울월드컵 3, 4위전이 벌어지던 날 2차 도발을 감행하게 됩니다.

서울 88올림픽 때에는 은밀히 대한항공 소속 KAL기 테러폭파를 감행했다면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아예 대놓고 군사교전을 벌인 셈입니다. 국제비난이 집중되자 김정일은 통전부 실무자들, 김윤심 해군사령관, 경비함 함장만이 알고 있었던 그 모든 책임을 8전대사령관 등 애매한 장성 몇 명을 해임시키는 방법으로 돌렸습니다. 그마저도 훗날 명예회복은 물론 영웅으로 내세워 남한에 대한 증오선전의 주인공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한은 3차 서해교전, 천안 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민족통일을 반대하는 주요 장벽은 이념이나 체제가 아닙니다. 정권유지를 위해 주민들을 억압하고 민족분단을 강요하는 김정일 정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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