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3대혁명은 김정일의 당, 군, 내각 3대 권력쿠데타

장진성∙탈북 작가
2011.08.09
parsimon_tree_army-305.jpg 북한군 제595군부대 예하 '3중 3대혁명붉은기' 감나무 중대의 여성 군인들이 부대를 방문한 김정일을 환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에는 사회혁신의 일환으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이란 것이 있습니다. 최근 북한에서 그동안 상징적으로만 존재해왔던 그 3대혁명운동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합니다. 일각에선 김정일의 세습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기 위해 김정은이 직접 주도한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오늘날의 3대혁명운동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학생들이 당의 위임을 받고 3대혁명소조원으로 추천 파견되어 지도하는 현장 감독 관리 형태였다면, 지금은 당조직부가 사회 전반에 걸쳐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지휘 관리하는 중앙 지도체제 형식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3대혁명운동이 오늘날 왜 이렇게 많이 변형됐을까요?

6.25전쟁 이후 김일성은 전후복구를 위해 천리마운동으로 사회 모든 분야에서의 양적인 발전에 주력합니다. 이어 1960년대부터는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양보다 질적인 발전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가 권력혼란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소련파가, 전쟁 이후에는 중국파가 득세했고, 빨치산 장군도, 전쟁영웅도 참 많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중앙권력의 혼란은 그대로 지방 말단으로까지 이어져 사회 곳곳에 부패와 비리, 혈연 주의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간부들의 검증 문제가 당 안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논의, 비판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홍위병과 혁명소조원들의 즉석재판과 처형에 쫒긴 많은 난민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오게 되자, 북한 정권 안에서는 북한과 중국 간 외교문제를 의식한 이념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필연적 결과라는 평가와 맑스-레닌주의 관점에서 볼 때 극좌적 오류라고 비판하는 대립 속에서 북한도 혁명 후의 계급투쟁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노선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되, 주체적 관점에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에 목적을 둔다는 이론적 합의에 이루게 되며, 그렇게 나오게 된 것이 바로 3대혁명입니다. 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들로 구성된 첫 3대혁명소조가 먼저 경공업 분야에 진출해 그 선발대를 시작으로 북한 전역에서 3대혁명소조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회 곳곳에 뿌리박힌 보신주의와 낡은 경험주의,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기 위한 초기목적의 그 3대혁명이 맑스-레닌주의 전통이념정당인 북한 노동당의 권력구조를 송두리째 바꿀 만큼 파워, 즉 개인의 이념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의 권력목적과 야망에 의해서입니다.

김정일은 3대혁명이야말로 자기 권력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정권세대교체 기회라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 그 운동의 국가화를 실현합니다. 김정일은 우선 당시 독점했던 선전선동 지도권한을 이용하여 3대혁명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모든 영화, 문학, 무대연극, 노래들마다 3대혁명을 선전하게 함으로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정치적 명분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어 당조직부 책임지도원을 걸쳐 당조직부 과장으로 임명되자 제일 먼저 3대혁명소조지도부를 당조직부 핵심부서로 끌어들이며, 당 조직비서가 되고나서는 아예 3대혁명소조지도부 부장직까지 겸직하게 됩니다.

김정일이 이렇듯 3대혁명소조지도부를 중시했던 이유는 3대혁명 명목으로 북한 내 권력을 정리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이 아니라 김정일에게는 당, 내각, 군 권력을 쥐기 위한 3대 권력 쿠데타인 셈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3대혁명소조운동에 있었습니다. 3대혁명 초기 북한 정책결정자들은 혁명계승을 위해서는 새롭고 참신한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하다는 이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 이론을 전제로 하는 젊고 충실한 당원들의 존재와 역할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중국의 홍위병들처럼 주도적 혁명이 아니라 합의형 혁명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에서 당, 행정결정권한을 분담시키는 방식의 감독, 동의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북한 노동당이 절대 권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3대혁명소조의 권위를 그 정도로 인정해주는 것도 한번쯤은 필요하다고 다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전국으로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은 사무실에만 앉아있는 간부들과 달리 발로 뛰는 생생한 현장파악을 근거로 담당단위의 행정결정권은 물론 인사권에도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대혁명소조운동을 주제로 하는 북한 영화 “군당책임비서”를 보면 군당과 군 인민행정위원회 간부들이 이제 겨우 20대 대학생인 3대혁명소조 책임자의 반대에 부딪혀 쩔쩔 매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만큼 3대혁명소조는 중앙당의 일시적인 위임권한으로 현장을 감독 조종하기 때문에 중앙권력 기반이 약한 김정일에겐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절대 호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상부에 보고하게 돼 있는 은밀한 통보체계가 당선, 국가보위부선밖에 없었습니다.

그 권력에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김정일은 자기 권한 직속으로 3대혁명소조 선을 별도로 만들고 그들이 보고한 현장자료를 토대로 먼저 지방기관 간부들에 대한 숙청부터 단행하게 됩니다. 그것을 점차 확대하여 연관된 중앙 권력의 핵심간부들까지 제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 우선적으로 사라진 간부들이 그동안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를 비난하거나, 세습권력을 반대했던 권력가들이었습니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외형적으로 대중운동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그 앞에선 그 어느 간부도 개인의 업적과 권위를 들이대거나 항변할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김정일은 자기의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 권력에 걸림돌이 되는 김일성의 측근들까지도 그 3대혁명 심판 대상으로 친인척 비리에 연루시켜 숙청했습니다. 정권안정을 목적으로 시작했던 세대교체가 김일성 자신의 권력까지 부정당하는 정권교체가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혁명 목적으로 시작된 3대혁명 광기는 김정일의 세습권력이 완성된 시점인 1980년대에야 비로소 식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3대혁명소조지도부 부장 직은 김정일에게서 매제인 장성택에로 옮겨져 그 때부터 북한에선 3대혁명운동 의미와 함께 대학생들로 조직되던 3대혁명소조활동도 점차 축소되게 됩니다. 오늘날 북한이 3대혁명운동의 불을 다시 지피는 것은 권력안정이나 세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위가 아니라 아래의 위협에 도전받기 때문입니다. 즉 기관에서 이탈한 거대한 시장 세력을 상대로 북한 정권이 벌이는 최후의 이념전쟁, 일종의 대중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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