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6군단 사건의 전말
장진성∙탈북 작가
2011.10.25
2011.10.25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 이 시간에는 6군단 사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6군단 사건’이라면 김영삼 정부가 북한 내에서 무력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안기부가 공작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무력부 보위 국 소속 한 여성 비밀공작원이 제보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
됐다는 이 사건을 두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었습니다. 6군단 포들이 금수산기념 궁전과 평양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하기로 했다더라, 6군단 반란세력과 야합하여 북침을 위해 남한 군 5만 명이 중국 동북 옌볜 지역에 노동자로 위장하고 콩 농사를 짓고 있다더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북한에서 개인이 아니라 수만에 달하는 일개 군단무력이 그 정도로 쿠데타 결의를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자유통일을 원하는 남한이라 할지라도 굳이 실현 불가능한 그것도 중국 국경에서 그 일을 추진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중국 또한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6군단 사건은 무력쿠데타가 아니라 중국식 개혁 성향을 가진 6군단 내 일부 장군들의 단순조직과 활동에 불과했습니다. 어쩌면 ‘친 한파’라기 보다 ‘친 중파’ 제거 작전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북한은 국가유일 경제관리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군부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군부대에서는 영양실조 환자와 탈영병이 속출했고 상하관계, 군민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군 범죄는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졌습니다. 군 고유의 명령, 복종체계까지 흔들리게 되자 김정일은 어쩔 수 없이 각급 군부대에 자체 외화벌이를 허락했습니다. 군부대 자체에서 살림살이를 알아서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자, 1994년 말부터 사회주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모든 군단과 사단, 여단에서까지 온갖 명칭의 외화벌이 회사와 기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그 어느 기관보다 폐쇄조직이었던 탓인지 개혁개방 바람은 삽시간에 전군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심지어는 군부대 지휘관들이 달러 맛을 알게 되면서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중국 국경 인접부대인 6군단은 전군이 부러워하는 외화벌이 군단이었습니다. 6군단 사건은 조선 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받고 내려갔던 시기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무력부 작전국장으로 일하다 과오를 범하고 지방 여단 부여단장으로 내려갔다가, 그 후 군수동원 총국장을 거쳐 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김영춘이 막상 군단에 가보니 사령부 정치위원을 비롯한 부대 지휘관들은 이미 귀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 제국주의라면 달러까지 증오하는’ 김영춘을 자기들과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우매한 존재로 낙인찍고 고립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춘의 지시는 전부 외화벌이를 방해하는 것들이어서 6군단 지휘부는 함북도당 책임비서와 짜고 그가 아직 혁명화가 덜 됐다는 거짓 보고를 중앙당에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6군단 정치위원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서 김일성의 특별한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김영춘은 부대지휘 능력을 상실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는데 이 같은 실태는 비단 6군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정일의 신임으로 부대장의 지위와 권위가 보장되던 것은 옛 말일 뿐, 곳곳의 부대 내에서 달러의 힘이 부대를 지휘 관리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달러를 통해 제국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나중엔 정권까지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항상 김정일을 괴롭혔습니다. 보다는 김일성 사후 군부 내 남아있는 김일성 측근들로 인해 선군유일지도체제가 아직 미완성 단계라는 것을 늘 불안해하던 김정일이었습니다.
하여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10만 축소 계획을 발표하는 한편, 무력부 보위국장 원응히에게 무력부 내 황색숙청 차원에서 미국과 남조선 돈에 매수된 간첩들을 적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원응히는 때마침 김영춘 6군단 사령관이 부대관리를 전혀 할 수 없다며 상부에 고발한 내용을 토대로 이른바 ‘6군단 쿠데타 사건’을 조작하게 됩니다. 군에 충격을 주려면 쿠데타, 즉 소수의 세력이 무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는 성격인 만큼 강한 것이 없었고, 또 외교 문제를 의식하여 친중개혁파 숙청보다 안기부 간첩단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중국식 개혁개방 의지로 은밀히 모였던 6군단 정치위원을 비롯한 지휘관들과 함북도 간부들이 안기부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김정일은 그 사회적 파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6군단을 통째로 남부지역으로 이전시켰습니다.
또한 그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모든 부대들에 비상게엄령을 선포하고 세대교체 명목으로 지휘관들을 대거 교체함으로서 명실공이 김정일 선군유일지도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부대 자체 살림살이나 자급자족 명목으로 진행되던 외화벌이도 중단시켰습니다. 그 후 현재까지 북한군의 외화벌이는 군단사령부나 군종별 사령부에서도 완전히 폐지됐습니다. 대신 중앙집권관리 형태로 총 정치국 54부, 총참모부 53부, 인민무력부 내 후방총국을 비롯해 국마다 하나씩 외화벌이 회사를 두는 형식으로 바꾸었습니다. 2000년에 들어와서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강화할 목적으로 국내 주요 닭 공장, 빵공장을 비롯한 인민경제 필수 생산단위와 금광, 광산, 어장 등 굵직한 외화벌이 기지들도 모두 군에 넘겼습니다. 그때부터 인민경제 공백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자 김정일은 온 사회의 선군 화 명목으로 농장들과 발전소, 건설장들까지 군이 감독 관리하게 하는 명령체계를 선언하기에 이룹니다. 만약 6군단에서부터 시작된 개혁개방 바람이 온 나라로 전파됐다면 지금의 북한은 훨씬 좋은 환경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개인이 아니라 수만에 달하는 일개 군단무력이 그 정도로 쿠데타 결의를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자유통일을 원하는 남한이라 할지라도 굳이 실현 불가능한 그것도 중국 국경에서 그 일을 추진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중국 또한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6군단 사건은 무력쿠데타가 아니라 중국식 개혁 성향을 가진 6군단 내 일부 장군들의 단순조직과 활동에 불과했습니다. 어쩌면 ‘친 한파’라기 보다 ‘친 중파’ 제거 작전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북한은 국가유일 경제관리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군부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군부대에서는 영양실조 환자와 탈영병이 속출했고 상하관계, 군민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군 범죄는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졌습니다. 군 고유의 명령, 복종체계까지 흔들리게 되자 김정일은 어쩔 수 없이 각급 군부대에 자체 외화벌이를 허락했습니다. 군부대 자체에서 살림살이를 알아서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자, 1994년 말부터 사회주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모든 군단과 사단, 여단에서까지 온갖 명칭의 외화벌이 회사와 기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그 어느 기관보다 폐쇄조직이었던 탓인지 개혁개방 바람은 삽시간에 전군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심지어는 군부대 지휘관들이 달러 맛을 알게 되면서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중국 국경 인접부대인 6군단은 전군이 부러워하는 외화벌이 군단이었습니다. 6군단 사건은 조선 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받고 내려갔던 시기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무력부 작전국장으로 일하다 과오를 범하고 지방 여단 부여단장으로 내려갔다가, 그 후 군수동원 총국장을 거쳐 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김영춘이 막상 군단에 가보니 사령부 정치위원을 비롯한 부대 지휘관들은 이미 귀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 제국주의라면 달러까지 증오하는’ 김영춘을 자기들과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우매한 존재로 낙인찍고 고립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춘의 지시는 전부 외화벌이를 방해하는 것들이어서 6군단 지휘부는 함북도당 책임비서와 짜고 그가 아직 혁명화가 덜 됐다는 거짓 보고를 중앙당에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6군단 정치위원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서 김일성의 특별한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김영춘은 부대지휘 능력을 상실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는데 이 같은 실태는 비단 6군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정일의 신임으로 부대장의 지위와 권위가 보장되던 것은 옛 말일 뿐, 곳곳의 부대 내에서 달러의 힘이 부대를 지휘 관리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달러를 통해 제국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나중엔 정권까지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항상 김정일을 괴롭혔습니다. 보다는 김일성 사후 군부 내 남아있는 김일성 측근들로 인해 선군유일지도체제가 아직 미완성 단계라는 것을 늘 불안해하던 김정일이었습니다.
하여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10만 축소 계획을 발표하는 한편, 무력부 보위국장 원응히에게 무력부 내 황색숙청 차원에서 미국과 남조선 돈에 매수된 간첩들을 적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원응히는 때마침 김영춘 6군단 사령관이 부대관리를 전혀 할 수 없다며 상부에 고발한 내용을 토대로 이른바 ‘6군단 쿠데타 사건’을 조작하게 됩니다. 군에 충격을 주려면 쿠데타, 즉 소수의 세력이 무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는 성격인 만큼 강한 것이 없었고, 또 외교 문제를 의식하여 친중개혁파 숙청보다 안기부 간첩단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중국식 개혁개방 의지로 은밀히 모였던 6군단 정치위원을 비롯한 지휘관들과 함북도 간부들이 안기부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김정일은 그 사회적 파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6군단을 통째로 남부지역으로 이전시켰습니다.
또한 그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모든 부대들에 비상게엄령을 선포하고 세대교체 명목으로 지휘관들을 대거 교체함으로서 명실공이 김정일 선군유일지도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부대 자체 살림살이나 자급자족 명목으로 진행되던 외화벌이도 중단시켰습니다. 그 후 현재까지 북한군의 외화벌이는 군단사령부나 군종별 사령부에서도 완전히 폐지됐습니다. 대신 중앙집권관리 형태로 총 정치국 54부, 총참모부 53부, 인민무력부 내 후방총국을 비롯해 국마다 하나씩 외화벌이 회사를 두는 형식으로 바꾸었습니다. 2000년에 들어와서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강화할 목적으로 국내 주요 닭 공장, 빵공장을 비롯한 인민경제 필수 생산단위와 금광, 광산, 어장 등 굵직한 외화벌이 기지들도 모두 군에 넘겼습니다. 그때부터 인민경제 공백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자 김정일은 온 사회의 선군 화 명목으로 농장들과 발전소, 건설장들까지 군이 감독 관리하게 하는 명령체계를 선언하기에 이룹니다. 만약 6군단에서부터 시작된 개혁개방 바람이 온 나라로 전파됐다면 지금의 북한은 훨씬 좋은 환경으로 변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