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무력부 보위사령부 원응희 사령관의 비참한 최후

장진성∙탈북 작가
201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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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평양 4.25 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12주년 기념보고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2003년 12월 평양 4.25 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12주년 기념보고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 이 시간에는 김일성 사후 선군유일지도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김정일이 어떻게 무력부 보위사령부를 활용했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원래 인민무력부 소속 일개 국으로서 보위국이란 명칭으로 존재해 왔었습니다. 마지막 보위국장은 김남선 중장이었습니다. 김남선 보위국장은 충성심이 누구보다 강했지만 김정일은 그가 중국 출신이라는 점을 의식하여 명예퇴임 시키고 대신 공군사령부 정치위원이던 원응희를 보위국장으로 새롭게 임명하였습니다.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된 원응희의 첫 작품이 바로 이른바 무력쿠데타 시도로 알려졌던 ‘6군단사건’입니다. 그 6군단사건을 계기로 보위국은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어 인민무력부에서 일약 국방위원회 직속기관으로 부상했습니다, 원응희 또한 상장단계를 거치지 않고 중장에서 곧장 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보위사령부가 그렇듯 절대 권력기관으로 커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사령부 내에 김정일 경호부대를 별도로 신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응희는 선군시대에 맞게 김정일 경호도 군에서, 보다는 군보안부서가 주도해야 한다며 사령부 내 김정일 경호 10처를 만들었습니다. 호위사령관이었던 리을설은 경호전통과 원칙을 깨고 이원화하려는 원응희를 당장 체포해 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분노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빨치산 출신 리을설은 김일성의 동지였고, 명예직의 국가원수였을 뿐, 김정일 신임을 받는 원응희 대장에 비하면 아무 권한이 없었습니다. 김정일이 원응희 보위사령관의 경호권한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이유는 단지 군대 제일주의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일성 생존 시 호위사령부가 김일성 경호 1호 호위총국과 김정일 경호 2호 호위총국으로 갈라져 있던 조직 내부의 갈등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과의 권력암투는 대외적으로는 충분히 감출 수 있었지만 근접 경호부대인 친위대에만은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각자 자기 주인에게 충실했던 1호 호위총국과 2호 호위총국 사이에도 항상 신경전이 오고갔고, 마침내 김일성 사망일엔 충동적인 무력분쟁까지 벌어지게 됐습니다. 물론 그 사건을 계기로 무장해제와 함께 1호호위총국을 해산하고, 리을설 국가원수를 제외한 1호총국 출신 호위사령부 간부들을 모두 2호총국 출신으로 교체했지만 김정일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원응희의 군 경호 부대 신설 안을 받아들여 보위사령부에 10처를 내오도록 허락했습니다. 과거 김일성, 김정일 현지시찰 장면들을 보면 친위대 병사들의 군복은 장교모자에 승마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군정치 이후 김정일 현지시찰 장면에서 비쳐지는 경호원들의 군복은 일반 북한군 장교복장과 다름없습니다. 다만 군복천이 더 고급스럽고, 권총을 양옆으로 찰 수 있도록 두터운 가죽 혁띠를 ✕모양으로 착용한 것입니다.

그렇듯 보안과 호위권한까지 독점한 보위사령부는 김정일의 선군시대를 열기 위해 군 장군들을 한꺼번에 물갈이 할 목적으로 1996년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리봉원을 안기부 간첩혐의로 체포합니다. 리봉원이 김정일의 눈 밖에 난 것은 작전국장 김명국에 대한 평가보고서를 잘못 올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작전국장 김명국은 김일성 생존 시 군부 내 김정일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계 확립을 위해 ‘정일봉상 쟁취운동’을 발기한 인물입니다. ‘정일봉상 쟁취운동’이란 해마다 2, 16일을 목표로 북한 전군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군사, 정치 혁신 운동입니다. 그 공로로 김정일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 김명국에 대해 리봉원이 해임건의안을 제출하자, 김정일은 오히려 그를 해임시킵니다. 나중엔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리봉원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합니다. 그리고 군부 내 인사행정을 총괄했던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이 심어놓은 첩자들을 청산한다며 군 장성 60명을 체포합니다. 심지어 보위사령부는 군에만 제한된 사법 권력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여 황해제철소 진압작전과 같은 민간인 학살도 주도합니다.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데 대해 국가보위부가 반발하자 백주에 무장군인들로 국가보위부 지휘본부를 포위하고 비리 명목으로 간부들을 체포하자 현장에서 국가보위부 제1부부장이 자살하게 됩니다.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으로 격앙된 북한 주민들의 불만심리를 계엄통치로 다스리기 위해 그렇듯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전횡을 적극 지원해줍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정일 독재 외에 그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절대권한을 장기적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과도한 권력남용을 의식한 김정일은,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할 시점인 1999년 초 보위사령부 내 경호담당 10처를 국방위원회 직속 행사총국으로 분리하고 보위사령부를 다시 총정치국에 예속시킵니다. 반면 “심화조 사건”을 계기로 사회안전성을 다시 제1감찰 권력 기관으로 내세워 그동안 권력기반을 늘려왔던 국가보위부와 무력부보위사령부의 입지를 위축시킵니다. 보위사령관 원응희도 ‘동희 사건’으로 불운한 생을 마감합니다.

동희 사건이란 북한의 이름있는 영화배우 리월숙의 남편이 평양시 만경대구역안전부에 의해 처형된 사건입니다. 보위사령부를 끼고 외화벌이를 해 상당한 돈을 벌어들인 동희는 예심과정에 보위사령관 원응희에게 10만달러를 주었다고 발설하게 됩니다. 당황한 만경대구역안전부는 이 사실을 원응희에게 전달했고 결국 입을 잘못 놀린 동희는 군중 앞에서 ‘황색숙청’이란 명목으로 공개 처형당합니다. 훗날 그 자료를 받아본 김정일은 원응희사령관만은 달러를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인줄 알았다며 명예퇴직을 권유합니다. 그 후 원응희는 2003년 보위사령관직에서 해임됐고 이듬해 간암 진단을 받아 치료 중 급사하게 됩니다. 김정일의 절대충신이었던 원응희의 삶은 이렇듯 남에게도 불행이었고 자신에게도 불행한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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