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요원한 김일성의 약속 '이밥에 고깃국'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11.02
junk_metal_nk-305.jpg 50여개 단위의 북한 중앙기관 일꾼들이 수집한 200여톤의 고철을 관계자들이 차량을 통해 천리마제강 연합기업소로 운송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결국 연합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쟁 실패 책임을 물어 북한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 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그렇지만 인민들 앞에 갑작이 나타나 북한의 지도자로 올라선 김일성은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한을 되살려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을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반세기가 되도록 김일성은 인민들에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었고, 아버지의 유훈정치를 펼치고 있는 김정일은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일성의 요원한 약속 '이밥과 고깃국' 얘기입니다.

'이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이 1949년 인민들에게 한 약속이었습니다.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한국전 이후 피폐된 북한에서 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으며 잘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이 약속은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에게 기대를 걸기에 충분했습니다. 김일성은 인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경제재건 정책을 내놓습니다. 바로 북한 경제 재건신화가 된 '천리마 운동'입니다.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에서 이름을 따온 '천리마 운동'은 인민들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루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김광진 방문 연구원은 북한의 '천리마 운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김광진
: 군중동원이다. 광범위한 군중동원으로 캠페인을 벌여 경제를 살리고 부흥시킨다는 내용이다. 천리마 운동으로 사실 많은 성과를 거뒀다. 그 자체가 북한 경제를 파괴시킨 요인은 아니고, 당시로서는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김일성은 인민의 힘을 동원하지 않고 천리마 운동을 추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전쟁 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초과달성 되기는 했지만 사회기간 산업의 일부가 여전히 전쟁 전 수준에 머물렀고 또 소비재 부족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힘겨운 상황에서 천리마 운동 5개년 계획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북한 주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천리마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북한 경제건설의 황금기를 이뤘고 한때 북한의 경제가 남한 경제를 앞설 정도로 북한은 경제재건의 신화를 써 내려갔습니다.

당시 6만 톤의 생산능력 밖에 되지 않던 한 제강소에서는 생산량을 12만 톤으로 늘리고 40일로 예정된 댐 건설 공사를 5일로 단축시키는 것은 물론 집 한 채를 14분 만에 짓는 등 믿기지 못할 성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북한지도부는 또 노동현장에서 목표를 초과 달성한 사람에게 '천리마 기수'라는 명칭을 주고 또 성과를 낸 조직에게는 '천리마 작업반'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인민들의 '천리마 운동'참여를 적극 유도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당시 잠시나마 김일성이 약속한 '이밥에 고깃국'의 꿈을 맛보는 듯 했습니다. 그렇지만 천리마는 천리를 달리지 못했습니다.

천리마 운동은 한국전으로 피폐된 북한 경제를 살리고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또 북한 지도부에게는 대대적인 체제 선전 수단이 되었지만 효율을 따지지 않고 밀어붙이기만 했던 경제계획은 부작용을 불러오게 됩니다. 사람들과 조직들은 영웅호칭과 달성목표를 위해 실제보다 높은 양을 달성했다고 허위 보고를 하는 등 ‘천리마 운동’의 성과가 과대포장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천리마 운동이 끝난 뒤 북한의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밥에 고깃국을 약속한 김일성의 약속은 요원해 졌습니다.

김광진
: 북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공산주의는 이미 왔다가 갔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집에 문을 잠그지 않고 다녔다. 그리고 이밥에 고깃국을 매일 먹지는 못해도 먹고 싶을 때 먹어다. 60년대 말 70년대 초가 북한의 전성기라고 본다.

결국 70년대 초 북한의 경제는 남한에 추월을 당하고 90년대를 전후해서는 이밥에 고깃국은 커녕 3백여 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죽는 사태까지 오게 됩니다.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은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을 모방한 여러 가지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지만 ‘천리마 운동’의 신화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김광진: 김정일이 3대혁명 소조운동을 발기했다.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해야 된다며 대학생들과 관료들을 전국 각지에 보내 지도사업을 하게 했다... 이것도 대중운동의 한 형태였지만 북소리만 요란했지 실속은 없었고 속이 빈 운동이 되었다.

김광진 연구원은 천리마 운동이후 나온 북한의 사회주의 대중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김광진: 사회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에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 모순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계획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권력의 독점이다...

김일성이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약속한지 6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경제는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어 있습니다. 쌀밥에 고깃국이라는 아주 소박한 약속이지만 북한 지도부는 2대에 거친 세습을 통해서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이번 주 순서를 마칩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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